독일경제 근간 ‘중견기업군’ 흔들린다

2025-12-08 13:00:46 게재

미국 관세압박에 중국 기술추격까지…제조업 심장 ‘미텔슈탄트’ 타격

독일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나를 죽이지 않는 고통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라고 말했다. 고통이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고 더 큰 가능성으로 이끄는 연료라는 것이었다. 니체의 이 말을 입증한 것은 독일경제였다. 독일은 제1차세계대전과 제2차세계대전 패전과 함께 잿더미로 변했지만 전후 40여년 만에 세계경제 4강으로 부상했다.

독일은 최근까지 세계 제조업의 챔프였다. 메르세데스·BMW·폭스바겐이 자동차 기술의 정점을 찍고, 보쉬·ZF·콘티넨탈이 수천개 부품 생태계를 지탱하는 동안, 지멘스·크루프·트룬프는 기계·전기·공작기계 분야에서 세계 표준을 만들었다. BASF와 바이어는 화학·소재 혁신의 원천이었고, 독일산 공작기계와 산업설비는 정밀 그 자체로 통했다.

독일경제는 2022년 하반기부터 서서히 힘을 잃기 시작해 2023년 독일 GDP 성장률은 -0.3%를 기록했다. 이어 2024년에도 -0.2% 성장률을 이어갔다. 독일이 두해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한 것은 20여 년 만에 처음이다. 사진 챗GPT 합성이미지

독일경제, “날개없는 추락”

1993년 유럽연합(EU) 출범 이후 독일은 줄곧 유럽 경제의 중심축이었다. 독일의 국내총생산(GDP)은 EU 전체 GDP의 22~25%에 달했다. 특히 2000년대 초반에서 2010년대 중반까지는 유로존 위기 속에서도 독일만이 플러스 성장을 유지하며 EU의 경기회복을 견인했다. 독일은 그동안 ‘유럽경제를 이끄는 기관차’였다.

그런 독일에 무슨 일이 생긴 걸까? 독일경제가 ‘날개없는 추락’을 하고 있다. 독일경제는 2022년 하반기부터 서서히 힘을 잃기 시작해 2023년 독일 GDP 성장률은 -0.3%를 기록했다. 이어 2024년에도 -0.2% 성장률을 이어갔다. 독일이 두해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한 것은 20여 년 만에 처음이다. 2025년 10월 기준 독일의 실업자 수는 약 291만명으로 전년 동월 대비 약 12만명 증가했다. 실업률은 6.2%로 1년 전보다 0.2%p 상승했다. 독일경제의 둔화 흐름은 주요 지표에서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최근 ‘추락하는 독일경제, 막을 방법은 없나?(Can anything halt the decline of German industry?)’ 라는 기사를 실었다. FT는 “독일 제조업 심장부에서도 이제는 더 이상 번영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있다”면서 “유럽의 제조업 챔피언은 지금 자유낙하 중”이라고 썼다.

독일 제조업 심장부는 ‘미텔슈탄트(Mittelstand)’다. 사전적으로는 ‘중간계층’을 뜻하는 미텔슈탄트는 독일 제조업을 지탱하는 중소·중견기업군을 일컫는 말이다. 중세 길드의 장인정신과 19세기 산업혁명, 20세기 첨단기술 등이 층층이 누적되면서 독일 제조업의 근간으로 자리를 잡았다.그런 미텔슈탄트가 흔들리고 있다. FT는 미텔슈탄트를 대표하는 명문 기업 중 하나인 트룬프(Trumpf)가 지난 10월 적자를 기록했다고 전했다. 세계적인 레이저・공작기계 제조업체인 회사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처음으로 손실을 기록했다는 것이다.

디칭겐(Ditzingen)시의 최대 납세자인 트룬프의 적자 소식이 전해진 직후, 트룬프본사가 있는 디칭겐시는 긴축조치를 강화한다고 발표했다. 2023년 이후 지방 기업세가 80%나 줄어들면서 예산 압박에 심해졌기 때문이었다. 시 재정담당관 패트릭 마이어는 FT와의 인터뷰에서 “타격이 어느 정도 있을 거라고는 예상했지만 이렇게까지 심각할 줄은 몰랐다”면서 “우리는 구조적 위기를 마주하고 있다”고 말했다.

독일은 4년째 침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글로벌 컨설팅 기업인 포르쉐 컨설팅의 파트너인 디르크 피프처(Dirk Pfitzer)는 FT와의 인터뷰에서 “독일 공학의 위기는 갈수록 커지고 있다”면서 “이 하락세는 경기순환적이지 않다는 것이 분명하다. 다음 경기회복기에도 저절로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유럽최대 컨설팅그룹인 롤랜드 베르거의 글로벌 매니징 디렉터 마커스 베렛(Marcus Berret)은 “독일의 경제 핵심 경쟁력 가운데 많은 부분이 지금은 취약성으로 바뀌었다”고 말했다.

트럼프 관세 독일 수출에 큰 타격

어디서 탈이 난 걸까? FT는 독일경제 추락의 원인으로 도널드 트럼프 미국대통령의 무역전쟁과 중국의 하이테크 강국 변신을 꼽았다. 트럼프 관세는 독일 수출에 큰 타격을 줬다. 지난 7월 EU는 미국과 15% 관세에 합의했지만 트럼프의 뒤죽박죽 무역정책은 중단되지 않았다. 합의 후 한 달 만에 미국은 기존의 금속 부품 50% 관세를 오토바이·철도차량·크레인·펌프 등 400개 이상의 품목으로 확대했다. 올해 1~9월 독일의 대미 수출은 전년동기 대비 7.4% 급감했다. 느닷없는 미국 관세는 독일의 여러 기업들에 충격을 주었다. 예컨대 니더작센주 스펠레의 농기계 제조업체인 크로네그룹은 대미 수출을 일시 중단해야 했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중국쇼크’

그러나 더 근본적인 문제는 ‘중국쇼크’였다. FT는 “미국에 물건을 파는 것이 어려워진 것이 문제의 전부는 아니다”라면서 “독일경제가 직면한 가장 큰 도전은 급속도로 성장한 중국의 산업 경쟁력에 맞서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중국산 제품은 더 이상 싸구려 저질 모방품이 아니다. 중국은 제품생산 속도에서 서구 경쟁자들을 훨씬 앞질렀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완제품으로 바꾸는 데 서구의 절반 시간이면 충분하다.

도대체 이런 ‘중국쇼크’는 언제부터 본격화 된 것일까? 전문가들은 코로나 팬데믹을 그 분기점으로 보고 있다. 팬데믹 이전 20여년 동안 중국은 독일 엔지니어링 제품과 자동차를 왕성하게 사들였다. 독일 제품에 대한 중국의 수요는 메르켈 시대 독일 경제를 견인한 핵심 엔진이었다.

매크로 경제 리서치 플랫폼인 ‘씬 아이스 매크로이코노믹스’의 창립자 스피로스 안드레오풀로스(Spyros Andreopoulos)는 “팬데믹 이후 중국은 점점 독일을 독일방식으로 이기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아우디·포르쉐·메르세데스-벤츠 같은 독일 프리미엄 자동차 브랜드가 먼저 타격을 받기 시작했다. 이어 자본재 제조업체들에게도 충격이 닥쳤다.

독일 자동차부품회사 셰플러의 CEO 클라우스 로젠펠트(Klaus Rosenfeld)는 FT와의 인터뷰에서 “중국은 지난 몇년 동안 독일의 주요 기술들을 꾸준히 추격해왔고 결국 따라 잡았다”라고 말했다. 독일 컨설팅사 '빈델리치 어드바이저스'의 파트너 틸로 쾨페(Thilo Koppe)는 “요즘 독일 미텔슈탄트 기업들이 지닌 대부분의 기술을 중국 기업들도 똑같이 할 수 있다”라고 밝혔다.

어떻게 할 것인가? 미국의 ‘아메리카 퍼스트’처럼 ‘유럽 퍼스트’ 정책을 펴야 한다는 목소리마저 커지고 있다. 2025년 5월 취임한 프리드리히 메르츠 총리는 경기부양과 산업경쟁력 회복을 핵심 국정과제로 제시하고 있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 함부르크 무역관의 11월 보고서에 따르면 독일 정부는 ‘성장 부스터(Wachstums-Booster)’ 프로그램을 통해 설비투자에 대한 세액 공제 확대, 인허가 절차 간소화, 연구개발(R&D) 지원, 노동시장 유연화, 에너지 비용 완화 등 종합적인 경기활성화 조치를 시행 중이다.

그러나 그 전망을 밝게 보는 이는 많지 않다. 경제 전문가들은 독일 산업의 구조적 문제점을 지적한다. KOTRA 보고서에 따르면 독일 경제의 근간을 이루는 ‘미텔슈탄트’가 현재의 보호무역 환경에서는 상대적으로 불리하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프랑크푸르트대학교 금융연구소의 볼커 브륄(Volker Bru‥hl) 소장은 “매출 규모가 1억~2억5000만(약1693억~4233억원) 유로 수준인 기업들은 미국 현지 공장을 설립할 여력이 없어 수출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며 “이런 구조는 독일 경제를 특히 취약하게 만든다”고 분석했다.

데카뱅크(DekaBank)의 울리히 카터(Ulrich Kater)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독일 내 노후한 인프라와 기술 격차, 고령화 등 구조적 과제에 미국의 통상 정책 변화가 겹치면서, 경제 구조 개선 속도가 더딜 수 있다”고 평가했다.

한국 제조업 역시 직면한 도전과제

남의 일 같지 않다. 우리나라 경제도 독일처럼 제조업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미국의 관세압박과 중국의 기술추격 역시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도전과제다. 미국과 중국은 거대한 두 자장(磁場)처럼 세계 제조업 지형을 흔들고 있다.

어떻게 하면 거센 미・중의 압박을 이겨 낼 수 있을까? 니체의 말대로라면 지금 우리가 직면한 도전과제들을 넘어설 경우 대한민국 경제가 독일 대신 세계4강으로 올라설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박상주

칼럼니스트

지구촌 순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