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AI 시대, 농업의 신뢰를 설계하는 분석기술
지난 여름 유럽의 한 밀 재배 농가를 방문했을 때 농장주는 “작년과 똑같이 했는데 작황이 형편없다”고 털어놓았다. 기온은 연일 40도를 넘었고 비는 오지 않았다. 토양 수분은 급격히 줄어들었지만, 예측 기반 관리 체계가 없던 그는 대응 시점을 놓쳤다. 결국 수확량은 30% 넘게 감소했고, 비슷한 상황이 유럽 전역으로 번지자, 국제 곡물 시장도 크게 흔들렸다. 주요 수출국들은 식량 안보를 이유로 수출 규제를 강화했고, 수입 의존도가 높은 국가는 비상 체제를 발동했다. 만약 이 농가가 토양과 기상 변화, 생육 정보를 실시간으로 분석해 인공지능(AI)이 관수 시점과 양을 제안하는 시스템을 갖췄다면 결과는 훨씬 달랐을지 모른다.
기후가 불안정해질수록 식량 위기는 경제 문제로 확장되고 농업은 더 높은 수준의 대응력을 요구받고 있다. 탄소중립 실현과 안정적 식량 공급망 구축, 기후변화 대응력 강화는 이제 국가의 생존 전략이자 필수 과제가 됐다. 이 변화의 중심에는 데이터가 있다. 경험에 의존하던 농업은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분석중심 산업으로 재편되고 있으며 이 데이터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기술이 미래 농업의 설계도를 그린다. 토양·기상·생육 정보를 결합한 스마트 영농, 병해충 발생을 예측하는 AI 모델, 탄소 배출 모니터링 기술 등은 이미 현장에서 활용이 확대되고 있다.
데이터 기반 분석 산업으로 재편되는 농업
AI의 의사결정은 데이터의 양보다 신뢰성에 좌우된다. 표준화되지 않은 값은 정책 판단을 왜곡하고, 분석 편차는 생산 전략과 환경 관리에 혼란을 가져온다. 탄소 배출 산정의 작은 오차도 국가 목표를 흔들 수 있으며, 비료 관리나 토양 진단의 오류는 생산성과 비용 구조 전반에 영향을 미친다. 농업 경쟁력 핵심은 결국 데이터의 정확도와 분석 품질이다.
한국농업기술진흥원은 이러한 분석 기반을 현장에서 구현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토양 비료 미생물 유전자 정보를 과학적으로 해석해 정책과 연구개발을 뒷받침하며, 다양한 기관에 흩어진 데이터를 일관성 있는 정보로 전환한다. 표준화된 시험 체계와 검증된 분석 결과가 갖춰질 때 비로소 데이터는 정책과 산업 현장에서 활용될 수 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석기술은 농업 전반을 지탱하는 기반시설과 같다.
진흥원은 AI가 신뢰 기반 위에서 작동하도록 분석체계를 강화하고, 자동화·고도화를 통해 데이터 생산 효율을 높이며, 국제표준에 부합하는 기술을 확산해 글로벌 품질보증 체계를 구축하고 있다. 이는 국내 농업정책의 정밀성을 높일 뿐 아니라 국제 협력에서도 중요한 경쟁력이 된다. 특히 기후변화 대응과 탄소중립 목표 달성을 위해서는 정밀한 측정과 검증이 필수적이며, 이러한 기술력은 국가 간 협력과 교역에서도 신뢰의 근거가 된다.
AI 시대의 농업 혁신은 정확한 분석이 받쳐줄 때 완성된다. 신뢰할 수 있는 데이터가 축적돼야 AI는 의미 있는 예측과 제안을 수행한다. 분석기술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그 기반이 흔들리면 전체 시스템이 불안정해진다. 기초 구조물이 건물을 지탱하듯, 분석기술은 농업의 디지털 전환을 떠받치는 구조물이다.
AI시대 농업혁신 정확한 분석 뒷받침돼야
진흥원은 그 구조의 중심에서 농업이 변화의 시대에도 흔들리지 않도록 역할을 이어갈 것이다. 데이터가 농업의 두뇌라면, 분석기술은 그 심장이다. 이 심장이 굳건하게 뛸 때 어떤 기후 위기 속에서도 우리 농업은 멈추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