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현장 리포트
‘전쟁범죄’ 논란 불거진 트럼프 ‘마약과의 전쟁’
9월 트럼프정부가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한 이래 지금까지 석달 동안 마약 수송선으로 의심되는 23척의 선박이 격침되었고 최소 87명이 사망한 것으로 집계된다. 마약 소탕을 위해 베네수엘라 본토 공격까지 가능하다며 군사행동의 수위를 높이고 있는 가운데 최근 헤그세스 국방장관이 ‘전쟁범죄’를 저질렀다는 논란이 불거졌다.
헤그세스 국방장관의 ‘전쟁범죄’ 논란
미군은 9월 2일 카리브해에서 베네수엘라 국적 선박을 격침시켰다. 당국은 이 배가 미국에 불법 마약을 공급하는 밀매조직 소속이며, 이를 타격한 군사작전은 정당하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11월 28일 워싱턴포스트(WP)의 단독보도에 의하면 이날 선박이 피격된 후 두명의 선원이 전복된 배에 매달려 생존해 있었다.
미군은 헤그세스 국방장관의 “전원 사살” 지시에 따라 이 생존자들을 추가 공격해 죽였다고 위싱턴포스트는 폭로했다. 기사는 난파된 선박 생존자에 대한 공격은 ‘전쟁 범죄’이며 연루된 사람들이 향후 기소될 수 있다는 전쟁법 전문가들의 의견을 전했다.
보도가 나온 후 백악관은 생존자 사살을 위한 ‘2차 공격’은 중대한 국익을 지키기 위한 조치로 문제될 것이 없으며, 다만 그 명령은 헤그세스 국방장관이 아니라 작전을 지휘한 프랭크 브래들리 해군 제독이 단독으로 내린 것이라고 밝혔다. 헤그세스 장관도 워싱턴포스트 보도가 조작된 선동이고 자신은 그런 명령을 내린 적이 없다고 부인하면서도 브래들리 제독의 ‘2차 공격’ 결정을 전적으로 지지한다고 했다.
전쟁범죄 논란이 쉽게 수그러들지 않자 의회가 진상파악에 나섰다. 두번째 공격 명령을 내린 전후 사정을 파악해 정부 주장대로 생존자들이 계속 ‘전투 중’ 이어서 이들에 대한 공격이 불가피 했는지, 아니면 배가 난파되어 전투 능력을 상실한 사람을 죽인 전쟁범죄인지를 가리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12월 4일 정보위 소속 의원들을 상대로 열린 비공개 브리핑에서 ‘2차 공격’을 지시한 것으로 알려진 브래들리 제독은 헤그세스 장관이 ‘전원 사살’ 명령을 내린 적이 없다고 말했다.
이날 브리핑에서 당시 상황을 실시간으로 녹화한 드론 비디오가 상영되었다. 영상을 본 의원들은 당적에 따라 전혀 다른 반응을 보였다. 배의 앞부분이 전복되었지만 여전히 물에 떠 있었고 두명의 생존자가 선체에 매달려 있다는 점은 서로 일치했지만 같은 장면을 두고 정반대의 해석이 나왔다.
민주당 소속 짐 하임스의원은 “내가 공직 생활을 하면서 본 것 중 가장 문제가 있는 장면이었다”면서 두명의 생존자가 파손된 선박에 매달려 극심한 조난상황에 처해 있었다고 ‘2차 공격’ 직전을 묘사했다.
하임스 의원은 난파된 선박을 공격하는 것은 불법이라고 국방부 매뉴얼에 나와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내가 본 영상을 보는 미국인이라면 누구나 미군이 난파된 선박 생존자를 공격하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즉, 저항 불가능한 선원을 살해한 전쟁 범죄라는 것이다.
민주당 잭 리드 상원의원은 성명을 통해 이번 브리핑을 통해 “트럼프정부 군사 활동의 본질에 대한 나의 최악의 두려움이 확인됐다”고 말했다. 민주당 의원들은 비디오 공개를 요구하고 있다.
반면 톰 코튼 공화당 상원의원은 두명의 생존자가 마약이 가득 실린 배를 뒤집어 전투를 계속 수행하려고 했고, 근처의 ‘마약 테러리스트’가 그들을 구출하러 오고 있을 수도 있다고 말하면서 ‘2차 공격’이 합법적이라고 두둔했다. 하지만 피격 당시 주변을 정찰하던 비행기는 근처 해상에 다른 선박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뉴욕타임스는 보도했다.
공화당 소속 릭 크로포트 의원도 2차 공격이 정당했냐는 기자 질문에 그렇게 생각한다고 답하면서 2차 공격을 훌륭하게 잘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렇게 양당의 입장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 가운데 향후 의회 차원의 조사와 청문회 등이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의회 차원의 조사와 청문회 가능성 커
트럼프정부는 미국이 현재 ‘테러리스트’ 마약 밀매업자와 전쟁 중이기 때문에 이들을 소탕하기 위한 군사작전은 정당하고, 생존자들을 사살한 2차 공격도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 법률전문가들은 이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설사 마약선박에 대한 공격이 합법적이라는 정부의 주장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부상병이나 포로 같이 전투능력을 상실한 사람을 죽이는 것은 국제조약과 미국 국내법에 비추어 명백히 불법이라는 것이다.
1949년 체결된 제네바협약 등 국제인도법은 무력충돌 시 적대행위에 가담하지 않거나 전투능력을 상실해 더는 가담할 수 없는 사람을 보호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즉각적인 위협이 되지 않는 민간인, 심지어 범죄 용의자라 할지라도 군대가 고의적으로 공격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국제사회의 합의다. 마찬가지로 미국 전쟁법 매뉴얼에도 난파된 선박을 공격하는 행위는 명백히 불법이고, 이런 전쟁법에 위반되는 명령을 거부해야 한다고 적혀있다.
의회가 ‘2차 공격’의 불법성 여부만을 따지는 것은 나무를 보느라 숲을 보지 못하는 오류라는 지적도 나온다. ‘2차 공격’만 아니라 ‘마약과의 전쟁’이라는 미명하에 민간인에게 치명적인 군사력을 행사하는 것 자체가 모두 불법이고 근본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범죄용의자를 경찰이 즉결 처분하는 것은 정당한 법집행이 아니라 살해범죄인 것처럼, 즉각적으로 위협이 되지 않는 민간인에게 설사 범죄 용의자라 할지라도 군대가 치명적인 무력을 사용해서는 안된다. 마약 밀수선 의심이 드는 선박에 대해 해안경비대가 나포해 조사하는 대신 미사일 공격으로 배 안의 모든 사람들을 살해하는 것은 그 자체로 범죄다.
더구나 의회가 전쟁을 선포하지 않은 상황에서 마약 카르텔과 미국이 무력 충돌을 벌이고 있다는 대통령의 ‘결정’만으로 군사 행동을 하는 것은 불법이라는 의견이다. 의회 조사가 ‘2차 공격’의 불법성 여부에만 초점이 맞춰진다면 결국 비디오 영상을 두고 서로 다른 해석을 벌이는 것처럼 상황의 진짜 문제점을 간과하는 소모적인 논쟁만 벌어질 것이라는 지적이다.
마약사범 사면한 트럼프의 모순된 행보
이렇듯 논쟁이 커지고 있는 가운데 전쟁범죄 처벌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표명해 온 헤그세스의 전력 또한 다시 도마에 오르고 있다. 그는 폭스뉴스 해설자로 일하던 시절 이라크 파병 중 민간인에게 총을 쏘고, 포로로 잡힌 적을 살해한 뒤 그 시신 옆에서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찍는 등 전쟁 범죄 혐의로 기소된 에드워드 갤러거 해군특전단(네이버씰) 중사를 적극 옹호한 바 있다. 트럼프 1기 정부 당시 트럼프가 갤러거 중사를 사면 복권하는 데 헤그세스의 논평이 영향을 미쳤다는 후문이다.
국방장관이 된 후에도 그는 이런 전쟁범죄 처벌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을 고수해 왔다. 예를 들면 1890년 여성과 어린이를 포함 무려 300명의 라코타 수 부족 원주민들이 미군에게 총격을 당해 목숨을 잃은 ‘운디드니 학살 ’이 벌어졌다. 미국 역사상 최악의 학살 중 하나로 기록되는 사건이다. 이 민간인 학살에 가담한 군인들에게 부여된 훈장을 박탈해야 한다는 요구에 대해 헤그세스는 자신이 국방장관으로 있는 한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못을 박았다.
또한 트럼프의 모순되는 행보도 비판을 받고 있다. 트럼프는 마약 밀매 혐의로 45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던 후안 올란도 에르난데스 전 온두라스 대통령을 이달 초 전격 사면했다. 에르난데스는 마약 밀매 조직과 결탁해 약 400톤에 달하는 코카인을 미국으로 밀반입한 혐의로 기소돼 지난해 6월 징역 45년형을 선고받았다.
에르난데스에 대한 사면은 마약 밀매를 막겠다는 미명 하에 바다에서 민간인들을 표적으로 초법적 살인을 벌이고 있는 군사 작전의 진의를 의심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