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구로형 기본사회, 일상을 지키는 새로운 기준

2025-12-10 13:00:02 게재

일일동장으로 동주민센터를 방문했던 어느 날, 창구 앞에서 상담 순서를 기다리던 한 어르신을 만난 일이 있다. “겨울이 되면 걱정이 많다”는 그 짧은 말 속에는 몸이 아플까, 난방은 괜찮을까, 혹시 연락이 닿지 않을까 하는 여러 불안이 겹쳐 있었다. 현장을 돌다 보면 이와 같은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그럴 때면 도시가 지켜야 하는 것은 화려하고 거대한 시설이 아니라 추운 계절에 불안을 느끼는 한 사람의 삶이라는 사실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구로는 산업과 주거가 공존하고 다양한 세대가 함께 살아가는 도시다. 청년과 고령층, 1인 가구와 가족 단위 주민이 함께 생활하는 구조는 일상의 위험과 돌봄의 부담을 더욱 세심하게 살펴야 함을 의미한다. 중앙정부의 단일 기준만으로는 이처럼 지역마다 다른 일상의 위험과 돌봄 수요를 충분히 담아내기 어렵다. 이에 구로는 생활 지형과 주민의 필요를 바탕으로 일상적 안전과 돌봄의 기반을 재정비하는 ‘구로형 기본사회’의 방향을 마련하고 있다.

구로형 기본사회는 거창한 정책을 더하는 것이 아니라 주민의 삶을 든든히 지킬 수 있는 기본 토대를 다시 점검하고 다지는 일이다. 도시의 변화는 대규모 개발이나 외형적 확장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주민이 체감하는 ‘하루의 안정’이 뒷받침될 때 비로소 지속 가능한 도시의 미래가 열린다.

주민 삶 지킬 토대 점검하고 다지는 일

구로는 이러한 관점에서 다음과 같은 원칙을 중심으로 행정을 운영하고 있다. 첫째는 일상의 위험을 줄이는 생활 안전 기반 강화다. 매년 반복되는 한파·폭설·화재 등 계절적 위험은 공사장·복지시설·가스시설 등 취약 지점을 면밀히 살피는 상시 체계를 필요로 한다. 최근 기후 변화로 예상치 못한 이상 저온과 폭설이 잦아지면서 기초적인 점검과 예방 활동의 중요성은 더욱 커졌다. 동주민센터와 지역 기관이 위험을 조기에 발견하고 고립·위기가구를 미리 파악해 도움을 제공하는 구조는 지역사회를 지키는 가장 기본적인 장치가 된다.

둘째는 돌봄의 공공성을 넓히는 일이다. 돌봄과 생활의 부담을 개인이나 가정이 홀로 감당하지 않도록 지역 공동체가 함께 참여하는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혼자 지내는 어르신의 안부를 세심하게 확인하고 이동이 어려운 주민을 돕는 생활 지원체계를 확충하는 일은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지역에서 더욱 필수적인 과제이다. 이는 복지 확대를 넘어 공동체가 서로의 일상을 지켜주는 도시의 기본 기능을 다시 강화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셋째, AI·데이터 기반 행정을 통해 위험을 예측하는 체계 구축이다. 지역의 인구 변화와 생활패턴을 신속히 파악하고 민원·현장 정보를 분석해 대응의 정확성을 높이는 일은 앞으로의 지방행정이 나아갈 중요한 방향이다. 빠르게 변화하는 도시 환경 속에서 기술은 위험을 보다 빨리 발견하고필요한 지원을 더 정확히 제공할 수 있는 도구가 되고 있다.

출발선의 차이가 삶 전체를 바꿔 놓는 현실은 산을 오르는 일과도 닮아있다. 누군가는 아무런 기반 없이 가장 낮은 지점에서부터 힘겹게 올라가야 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이미 높은 지점에 자리한 베이스캠프에서 출발하기도 한다. 이러한 출발선의 차이는 개인의 의지나 능력만으로는 메우기 어려운 간극을 만들곤 한다. 기본사회가 바라보는 문제도 마찬가지다. 노력만으로 넘기 힘든 경사와 위험이 있고 그 부담을 개인에게 맡겨두기에는 사회 변화의 속도가 너무 빠르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바로 누구나 산 중턱에서 출발할 수 있도록 사회가 공동의 ‘베이스캠프’를 마련하는 일이다.

누구나 머물러 살고 싶은 도시 가꾸기

고령화와 기후위기, 기술 발전 등 시대의 대전환 속에서 삶의 위험을 더 이상 개인과 가족의 책임만으로 돌릴 수는 없다. 진정으로 품격 있는 도시는 ‘최소한의 삶’을 버티게 하는 것을 넘어 이웃이 겪는 위험을 얼마나 덜어주는가에서 그 가치가 드러난다. 구로는 주민의 하루하루가 흔들리지 않도록 사회적 안전망을 차분히 살피며 누구나 머물러 살고 싶은 도시로 나아가는 길이다.

장인홍 서울 구로구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