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규모의 경제에서 유연성 경제로
전력산업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 지금까지는 대규모 발전소를 건설해 중앙집중형 송전망을 통해 수요처로 전기를 보내는 '규모의 경제'가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태양광, 풍력과 같은 변동성 재생에너지 비중이 늘어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전력공급, 수요, 운영, 송배전 등 전력시스템 전반에 걸쳐 ‘유연성 경제’를 요구하는 시대가 되었다. 유연성 경제는 전력수급 상황에 따라 발전량을 실시간으로 조절할 수 있는 유연성 전원의 확대를 요구한다.
재생에너지는 가상발전소(VPP) 기술과 AI를 활용하여 발전량을 보다 예측가능하게 해야 한다. 화력발전소와 같이 급전 가능한 자원이 되어야 진정한 주력전원이 될 수 있다. 경직성 기저전원인 원전은 좀 더 유연해질 필요가 있다. 프랑스 원전들은 전력수급 상황에 따라 출력을 조절할 수 있는 부하추종 운전기능을 갖고 있다.
전력이 남아도는 시기에는 전기뿐만 아니라 열과 수소를 생산할 수 있는 탄력운전 기능을 구현해 낼 수 있어야 재생에너지와 같이 갈 수 있다. 석탄과 가스발전소는 규모의 경제시대 대표적인 유연성 전원이다. 가스는 브릿지 전원이기도 하다. 그러나 탄소중립 전력망은 무탄소 유연성전원들로 조속한 대체를 요구한다. 대표적인 무탄소 유연성 자원은 에너지저장장치(ESS), 수소발전, 양수발전이다.
탄소중립 전력망, 무탄소 유연성전원 요구
에어컨, 전기차, 히트펌프 등으로 대변되는 전기화는 전력수요를 크게 증가시킬 뿐만 아니라 전력수요 자체를 경직화시키기도 한다. 그런데, 소비자가 능동적으로 전력사용 패턴을 조절하는 수요반응(DR)이 작동된다면 수요측면에서도 유연성 경제가 실현될 수 있다. 수요반응은 AI를 만나 유연성반응(FR)으로 한층 더 진화해 나갈 수 있다.
에너지고속도로는 지역에서 생산된 전기를 수도권으로 보내는 대규모 송전망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지역에서 생산된 전기가 해당지역에서 소비되는 지산지소 방식의 지능형 분산전력망으로 우리 전력망을 보다 유연하게 재설계하자는 것이 그 기본취지이다. 지역의 분산형 전력망에서 남는 전기는 양방향으로 전기가 흐르는 초고압직류송전(HVDC)를 통해 다른 지역의 분산형 전력망과 서로 연결된다.
전력시장도 유연성 경제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일대 혁신이 필요하다. 재생에너지 변동성을 완화하고 계통안정화에 기여하는 ESS, DR 등 유연성 자원이 시장에서 거래되어야 한다. 관성, 주파수, 전압, 예비력 등 유연성 투자에 대한 적정보상도 시장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소규모 분산자원을 하나의 발전소처럼 통합하여 운영하고 전력시장에도 참여하는 VPP가 유연성 시장에 적극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전력수급 상황에 따라 실시간으로 변화하는 동적요금체계를 단계적으로 준비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가격 차이를 이용하여 유연성 자원에 투자하는 다양한 비즈니스 모델이 활성화될 수 있다.
유연성 경제는 새로운 성공방정식
유럽 호주 미국 일부주 등 실시간 동적요금제를 실시하고 있는 지역에서는 일부 시간대에 마이너스(-) 전력가격이 다수 발생하고 있다. 재생에너지 발전량이 많은 시간대에 남는 전기를 버리지 않고 에너지 저장, 전기차 충전, 그린수소 생산에 나서는 스타트업들이 속출하고 있다. 유연성 경제는 탄소중립 실현, 에너지안보 구현, 가격수용성 증대라는 복합목표를 동시에 달성하기 위한 새로운 성공방정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