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병억의 영국 톺아보기
아직도 브렉시트 유령에 시달리는 영국
내년 6월 23일이면 영국의 유권자들이 3.8%p 차이로 브렉시트를 결정한 국민투표가 이뤄진 지 10년이 된다. 10년이 다가오는데도 브렉시트의 어두운 그림자가 영국 사회 곳곳에 길게 드리워져 있다. 브렉시트가 초래한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인정하지 않는 극우세력들이 오히려 더 계속해서 세력을 확대해 왔다.
미국의 전미경제연구소(NBER)는 민간의 독립적인 싱크탱크로 유명하다. 각종 경제자료를 분석해 심층평가해 왔는데 지난달 브렉시트가 영국 경제에 큰 손실을 끼쳤음을 종합적으로 해부한 보고서를 발간했다. 결론은 2016년 브렉시트 국민투표 후 5년이 지나 평가한 손실보다 10년이 경과하면서 발생한 손해가 더 크다는 것이었다. 5년과 10년의 시간 경과를 두고 5명의 전문가들이 참여해 경제성장률과 무역 투자 등 각 분야에 미친 영향을 종합 비교했다는 의미가 있다. 일회성 분석이 아니다.
유럽연합(EU)에 잔류할 때와 비교해 연간 세수가 900억파운드 줄었다. 1인당 국내총생산은 2700파운드~3700파운드 감소했다는 게 이 보고서의 평가다. 한 사람에 최대 720여만원의 손해를 봤다는 것이다. EU 탈퇴를 결정한 국민투표 후 영국의 국내총생산은 EU잔류 때와 비교해 6~8% 정도 적어졌다. 영국 무역의 절반을 차지하는 시장을 떠나 EU와 장벽을 세우고 이를 만회할만한 대체시장을 개척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올 초 런던정경대학교(LSE) 경제실적센터의 조사도 이와 유사하다. EU와 교역을 하던 영국 기업을 조사했더니 1만6400개 중소기업이 EU에서 탈퇴 후 수출을 중단했다. 영국은 탈퇴 후 EU와 무역협력협정을 체결해 무관세 무쿼터로 교역 중이다.
탈퇴 이전에 영국 기업들이 EU와의 교역에 필요한 최소한의 서류에 견줘, 탈퇴 후에는 이런 서류가 2.5배 정도 늘었다. EU 회원국이었을 때에는 회원국 간에 단일시장(내부시장)이 형성돼 있어 아무런 장벽도 없이 상품과 서비스를 수출했다. 하지만 탈퇴 후에는 수출입에 따른 통관서류 등을 작성해야 하는 등 여러가지 이전에 없던 비용이 발생했다.
브렉시트 손실이 가짜뉴스라는 극우
수많은 연구소의 이런 객관적인 평가에도 정당 지지도에서 1위를 달리고 있는 극우 영국개혁당의 나이젤 패라지 총재는 이를 가짜뉴스로 규정해왔다. EU와 아무런 협약이 없이 탈퇴하는 강경 브렉시트(hard Brexit)를 감행하지 않아 경제에 손실이 발생했다는 게 패라지를 비롯한 극우 정치인들의 한결같은 레파토리다. 탈퇴하면서 EU와 체결한 무역협력협정조차 강경 브렉시트와 유사한데 말이다.
영국의 대미 무역보다 3배가 더 가는 EU에서 탈퇴하면서 시장 접근을 더 확대할 수 있었는데 당시 보수당 정부는 거부했다. 미국의 트럼프행정부가 출범하면서 영국에 부과한 고율의 관세를 10%로 낮췄을 뿐이고 두 번째 교역 상대국 미국과의 FTA는 너무나 요원하다.
나이젤 패라지는 2016년 상반기 브렉시트 찬반 국민투표 선거운동에서 보리스 존슨과 함께 브렉시트 찬성 운동을 이끌었다. 존슨이 당시 런던시장이자 유력한 보수 정치인이었던 반면 패라지는 영국독립당이라는 의원이 한 명도 없는 소수 주변 정당의 당수였다.
존슨은 1990년대 몇 년간 브뤼셀에서 특파원으로 일하면서 유럽연합을 잘 알던 인물이다. 그는 마지막 순간에도 EU잔류/탈퇴를 두고 고민하다가 브렉시트로 방향을 정했다. 평생 꿈이었던 총리가 되려면 자신을 더 확실하게 각인시킬 수 있는 브렉시트가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이후 그는 2016년 7월부터 2년 간 외무장관, 2019년 7월부터 3년 2개월 간 총리로 재직했다.
아웃사이드에서 주류로 떠오른 패라지
존슨은 브렉시트의 과실을 다 따먹었지만 패라지는 이후 8년간 정치적 아웃사이더로 머물렀다. 독립당을 나와 2018년 브렉시트당을 창당했고 3년 후에 영국개혁당으로 당명을 변경했다. 지난해 7월 4일 조기 총선에서 개혁당은 5석의 하원의석을 거머쥐었고 패라지도 하원 배지를 달았다. 하원의원이 된 후 그의 발언권은 더 커졌고 데일리텔리그래프와 데일리메일과 같은 보수지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는 불법이민을 강경 단속하겠다며 민심을 사로잡았다. 개혁당을 비롯한 영국의 급진 우파는 주인인 백인 영국인이 불법 난민들 때문에 소수로 전락중이라고 인식한다. 이 때문에 채용에서조차 차별을 겪고 자랑스런 영국 문화와 역사가 내팽개칠 것이라는 과장된 공포심을 심어준다. 그렇기에 패라지는 집권하면 60여만명의 불법 난민을 강제 추방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수십 억 파운드가 들어가는 난민 송환비용 조달을 거론하지도 않는다.
오랜 저성장에 지친 유권자들은 집권 노동당에 벌써 등을 돌렸다. 작년 7월 총선에서 노동당은 하원 의석의 2/3에 가까운 의석으로 압승을 거뒀다. 그러나 올 2월부터 영국개혁당은 정당 지지도에서 노동당을 앞서기 시작해 8~10%p 격차로 집권당을 제쳤다. 변변한 지역구도 없고 패라지 1인에 의존하는 5석의 정당임에도 개혁당의 지지도는 30% 안팎을 기록 중이다. 비상이 걸린 노동당은 개혁당의 인종주의적 정책을 공격하지만 지지율에 별로 영향이 없다.
개혁당이 이처럼 불법 이민을 전면에 내세우며 인종주의적 입장을 보이는데 정당 지지도에 따라 평가는 극과 극이다. 유거브가 9월 29~30일 2283명의 성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노동당과 자유민주당, 녹색당 등 진보적 정당의 지지자들은 2/3가 영국개혁당과 정책, 그리고 개혁당 지지자들이 인종주의적이라 여긴다.
반면 개혁당 지지자들은 4%, 보수당 지지자들은 23%만이 개혁당이 그렇다고 생각한다. 유권자 전체로는 46%가 개혁당을 인종주의적이라 간주해 아니라는 의견보다 8%p 높았다.
패라지는 EU를 탈퇴하면 영국 경제가 번창하며 불법이민도 크게 줄일 수 있다고 누누이 강조해왔다. 그러나 탈퇴 후 EU시민의 영국 이민은 줄었지만 비EU 시민들의 영국 이민은 늘어났다. 사실상 제1야당이 된 당수가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녹음기처럼 계속해서 동일한 거짓 주장을 되풀이 해왔다. 이처럼 브렉시트와 밀접하게 관련된 이민문제를 활용해 절정에 오른 인물이 거짓 주장을 반복하는데도 이 그늘을 걷어내기가 쉽지 않고 오히려 더 길고 짙어진다.
보수 일간지가 영국판 트럼프인 패라지의 든든한 뒷배다. 일간지 데일리텔리그래프는 보수세력의 대변자로 정평이 나 있어 보수당을 뜻하는 토리를 붙여 ‘토리그래프’(Torygraph)로 불려왔다. 패라지를 키우는데 일등공신인 이 신문은 최근 같은 보수지 데일리메일에 팔렸다. 데일리메일은 지난달 말 5억파운드에 텔리그래프를 매입하기로 합의했고 문화부의 승인을 앞두고 있다. 두 신문 모두 5대 일간지에 속하는데 이번에 합병이 승인되면 보수지의 영향력이 훨씬 더 커질 것이다.
노동당이 불리한 정치환경을 극복하려면
집권 노동당은 더 불리해지는 여론환경에서 정책으로 정면승부하고 경제성장률 제고에 매진해야 한다. 최근 노동당정부는 연 50조5000억원 정도의 증세안을 발표했다. 200만파운드(38억9000만원) 이상 주택에 기존 부과되는 지방세 이외에 저택세를 도입하고 배당금과 저축 세율도 올렸다. 하지만 소득세 과세 기준은 동결해 서민에 대한 증세는 없다는 공약을 가까스로 지켰다. 이번 증세안은 보수의 집중적인 비판을 받았지만 올바른 방향이다. 저성장 극복을 위한 세원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공산당 선언’ 첫 문장에 나온 것처럼 브렉시트 유령이 영국을 떠돌고 있다. 극우 세력들은 유령에 올라타 휘젓고 다니며 세력을 확대중이다. 하지만 집권 노동당은 아직도 총선까지 3년 반이 넘는 시간이 있기 때문에 정책에서 차분하게 결실을 내면 이 유령을 쫓아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