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트럼프 안보전략, 북한이 사라지고 중·러는 달라졌다

2025-12-12 13:00:01 게재

지난 5일 트럼프 대통령이 발표한 미국의 19번째 ‘국가안보전략’이 논란을 낳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의 보수주의적 관점에서 작성된 33쪽 문건은 역대 문건과 성격이 크게 다르다. 미국의 역할과 세계의 이념적 가치를 재정의하려는 시도도 보인다. 이번 문건이 전략의 최우선 순위를 미국 본토와 서반구에 두고 먼로주의를 소환한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유럽을 ‘문명 소멸’ 위기에 처했다고 하고, 유럽연합(EU)의 초국가적 정체성과 진보정책을 비판하며 미국이 이를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한 대목은 과도해 보인다.

한국은 이번 문건에 세번 언급된다. 중국의 경제 재조정과 대외 영향력 견제를 위한 파트너로 두번, 제1도련선(오키나와–대만–필리핀–말라카해협) 방어를 위한 국방비 증액 필요국으로 한번 등장한다. 한국에 기대하는 바가 중국 견제임이 분명해 보인다.

중국은 이번 문건에서 경제적 경쟁자, 공급망 취약성의 원천, 무역 파트너, 지역 패권 추구 저지의 대상으로 묘사된다. 트럼프 1기 당시 중국을 인도·태평양에서 미국을 대체하려는 수정주의 세력으로 규정했던 것과 대비된다. 이번 문건은 중국과의 ‘호혜적 경제관계’가 미국의 장기 활력 기반에 중요하다고 평가한다. 동시에 중국이 2017년 이후 미국의 관세정책에 적응하면서 공급망 장악력을 오히려 강화했다고 적시한다. 사실상 미국 관세정책의 실패를 인정한 셈이다.

대만 관련 충돌 가능성에 대해 이번 문건은 ‘이상적으로는’ 군사적 우위를 유지함으로써 억제하는 것이 최우선이라고 밝힌다. 제1도련선 방어가 미군 단독으로는 어렵고 동맹국의 집단적 역할이 필요하다는 점도 명확히 한다. 미국이 최초로 중국에 군사적으로 압도당할 수 있음을 공개 언급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중국과 러시아, 미국 새 안보전략 긍정평가

중국은 “중미 협력이 올바른 선택이며, 미국이 양국 정상 간 합의를 잘 이행하길 바란다”고 반응했다. 트럼프 1기 당시 미국에 “냉전적 사고를 버리라”고 비판했던 것과 비교하면 중국은 이번 문건을 자신들의 요구가 반영된 조치로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높다.

러시아 관련 변화도 크다. 2017년 러시아를 수정주의 세력으로 규정했던 것과 달리 이번에는 ‘러시아와의 전략적 안정 추구’를 우선 과제로 제시했다. 크렘린궁이 이번 조치를 ‘긍정적 변화’라고 평가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북한은 이번 문건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2017년 북한은 17번 등장했다. 당시 북한을 미국 본토를 위협하는 핵무기 개발 국가로 규정하고 압도적 군사력으로 대응 태세를 갖추고 한반도 비핵화를 강제할 옵션을 강화하겠다고 했었다. 북한의 부재는 김정은 위원장을 대화로 끌어내기 위한 전술일 수 있다. 실제로 미국은 한미 정상회담 공동 설명자료에도 명시했듯이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를 정책기조로 유지하고 있다. 미국이 북한을 관리 가능한 위협으로 재분류한 것인지, 아니면 전략적 우선순위에서 배제한 것인지도 확인이 필요하다.

만약 미국이 북한 비핵화 포기를 포함한 재량권을 갖고자 북한을 뺀 것이라면 문제는 훨씬 까다로워진다. 이런 상태로 북미 정상회담이 추진된다면 한미동맹 관련 북한의 요구가 예상보다 폭넓게 반영될 가능성도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분쟁 중재력에 대한 자부심과 노벨평화상에 대한 집념을 고려하면 우려가 커질 수밖에 없다.

2차대전 이후 미국 능력의 약화 또는 전략적 변화는 국제질서의 위기를 불러왔다. 위기 때마다 미국은 기축통화 발권력과 금융 우위를 활용하고, 무역 불균형을 흑자국에 전가함으로써 패권을 유지해 왔다. 트럼프 대통령은 동맹국과 우방국에 대한 투자 요구, 관세 부과, 안보비용 전가를 통해 위기를 해결하려고 한다. 반면 북·중·러에 대해선 유화적으로 선회한 점이 주목된다. 최근 대만 관련 중일 갈등에서 미국이 일정한 ‘거리두기’를 한 것도 시사적이다.

강대국 위주 구조변화 우리 외교공간 좁아져

강대국 위주의 구조적 변화가 가속화되면 중견국 외교의 공간이 좁아질 수 있다. 정부가 최근 분주히 움직이는 것도 격변기 환경을 고려한 대응으로 보인다. ‘국익중심 실용외교’를 내세운 정부가 임기 초 대미 관세협상이라는 초대형 현안을 타결하고 핵추진 잠수함 확보와 핵연료 주기 완성 등 주요 과제 해결에도 합의했다.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의 성공적 개최와 아중동 지역까지 외교 지평을 넓힌 것도 유의미한 성과다.

다만 이런 성과는 출발점에 불과하다. 외교의 일관성과 지속성 확보를 위해서는 초당적 협력이 필수적이다. 정부와 국민, 정치권과 언론이 어떻게 힘을 모으느냐에 따라 한국 외교가 국익과 경제 안보, 민생에 미칠 파급력도 근본적으로 달라질 것이다.

노규덕 전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