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의 눈
일장춘몽 ‘용산시대’
“제왕적 대통령의 상징인 청와대는 절대 들어가지 않겠다.” 2022년 3월 윤석열 당시 대통령 당선인은 기자회견을 열고 ‘탈 청와대’를 선언했다. 이날 윤 전 대통령은 “결단하지 않으면 제왕적 대통령제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며 “단순한 공간의 이동이 아니라 제대로 일하기 위한 각오와 국민과의 약속을 실천하고자 하는 저의 의지”라고 강조했다. “공간이 의식을 지배한다”는 명언(?)도 이날 남겼다.
처음엔 문재인 전 대통령의 공약이었던 ‘광화문 집무실’이 고려됐지만 여러 이유로 용산 국방부 신청사가 최종 낙점됐다. 대통령실 이전은 두 달간 번갯불에 콩 볶듯 강행됐다. 그러나 취임식 후에도 마무리되지 않았다. 청사 안팎 곳곳에서 이후 2년가량 크고 작은 공사가 이어졌다.
처음 찾은 용산 기자실을 잊을 수 없다. 먼지 쌓인 수십 개의 책상이 어지러이 널려 있는 모습이 개업 준비가 덜 된 동네 독서실을 방불케 했다. 화장실은 두어 명만 서 있어도 좁았고 남성용은 소변기마저 고장난 상태였다.
기자들은 그래도 낯설고 불편한 변화를 기껍게 받아들였다. 대통령과 자주 직접 소통할 수 있다는 기대가 컸다.
‘용산 시대’의 핵심은 대통령·참모진·취재진이 ‘한 지붕’ 아래서 지낸다는 점이었다. 기자실에서 복도로 나오면 반대편 현관을 통해 대통령이 드나드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대화가 가능한 거리였다. 참모들은 청와대 시절보다 훨씬 가까워진 대통령 집무실을 수시로 드나들 수 있게 됐다. 기자와 참모들이 출입로도 같아 조우가 잦았다.
춘추관에선 볼 수 없던 파격 탓에 웃지 못 할 일도 있었다. 경호처는 출입기자들의 휴대전화에 원격 보안 애플리케이션을 설치하려다 논란 끝에 포기했다. 기자 출입증 케이스 색깔을 샛노랗게 통일시키려다 ‘기자들을 쉽게 구분케 하려는 것 아니냐’는 반발을 사기도 했다.
‘도어스테핑(출근길 약식회견)’으로 의욕충만하게 시작됐던 용산시대는 그러나 우여곡절·좌충우돌 끝에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불통의 길로 저물어갔다. 소통이 빠진 한지붕 살림은 무의미한 동거였고, 대통령과 참모들의 물리적 거리 단축도 ‘정치를 안다’는 착각에 빠진 보스의 자멸을 막지는 못했다.
대통령실이 3년 7개월 만에 다시 청와대 이전작업으로 분주하다. 대통령 관저를 제외하면 성탄절 전까지 대부분 복귀가 될 거란다.
용산시대가 ‘내란’ 말고 어떤 기억으로 역사에 남게 될지 잘 떠오르지 않는다. 공간이 의식을 지배하지도, 제왕적 권력을 내려놓게 하지도 못했다.
다만 짧게나마 최고권력 속에서 움텄던 소통의 싹이 청와대에서건 세종에서건 유능한 지도자를 통해서 다시 뿌리내리고 자라는 모습을 보고 싶을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