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면기 칼럼
용산시대가 대한민국 보수에게 남긴 질문들
대통령실이 연말에 청와대로 복귀한다고 한다. 돌아보면 윤석열의 용산시대 1000일은 한국정치사에서 혼돈과 위기의 시간이었다. 국정은 혼란스러웠고 민주주의는 질식했다. 남북관계는 전쟁 직전 상황까지 치달았고, 격동하는 세계에서 외교는 표류했다. 알콜 중독자처럼 술을 탐하던 대통령이 다수 국민을 종북 반국가세력으로 몰아치고 야단치는 것이 정치의 일상이 되었다.
이제 윤석열 부부와 수하들은 폭정과 내란, 일반이적죄 혐의 등으로 법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다. 윤석열이 아직도 12.3 계엄의 정당성을 강변하고 있고, 극우 지지자들이 ‘윤 어게인’을 외치지만 국가변란을 기도한 이들이 역사와 법의 심판을 피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권력을 사유화하고 삿되게 휘두른 김건희씨도 당연히 자신의 죄과에 대한 합당한 처벌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용산시대 마감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마음은 여전히 착잡하다. 국가가 정상화되고 있다는 안도감이 크지만 국정의 한 축을 감당해야 할 국민의힘이 아직도 극우적 망상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용산시대를 거치면서 대한민국 보수는 그동안 쌓아온 정치적 자산을 모두 탕진했다. 국가안보와 경제성장은 보수라는 ‘신화’도 빛이 바랬다. ‘벌거벗은 임금님’ 앞을 가로막고 나서는 책임지는 정당으로서도, 국민들의 이익을 정치에 투입하는 정치세력으로서도 성공하지 못했다. 그리고는 극우적 주장을 전파하는 데 당력을 쏟아부었다. 그러다 결국 나라를 나락으로 밀어넣었다. 자기 철학없는 보수의 자화상이다.
위기의 한국 보수가 버려야 할 것들
돌아보면 한국 보수의 위기는 이미 오래전부터 예견돼 온 일이다. 꼭 10년 전인 2015년 말 교수들은 ‘혼용무도(昏庸無道)’라는 말로 박근혜정권의 무능과 혼돈을 질타했다.
박근혜정권의 실정은 결국 탄핵으로 이어졌지만 집권 보수세력은 실패를 성찰하는 대신 증오의 정치로 나아갔다. 권력을 찾아올 수만 있다면 못할 것이 없다는, 권력을 지킬 수만 있다면 누구와도 손잡을 수 있다는 감정의 포로가 되었다. 정치 경험이 전무한 검사 윤석열이 대통령이 된 배경이다.
한국정치를 보수와 진보로 재단하는 데 동의하기도 어렵지만 모든 책임을 보수로 돌리는 것 역시 온당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국민의힘이 ‘보수의 실패’를 되돌아보기는 커녕 진보를 비난하는 것으로 상황을 반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낡은 이념과 사상으로 새로운 시대를 감당할 수는 없는 법. 국민의힘은 감정의 정치, 극우의 정치를 접고 합리적 공론장으로 복귀해야 한다. 그러려면 먼저 보수의 좌절을 불러온 고질적 사고들을 과감히 폐기해야 한다.
첫째, ‘적의의 정치’를 떠나야 한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적대시하지 않으면 자신의 존재가치를 증명할 수 없는 정치는 정상이 아니다. 북한과 중국을 무조건 적대하고, 반대세력을 ‘좌빨’로 몰아세우며 제거해야 한다는 언설은 이제 듣기에도 민망하다. 계엄을 막아선 시민을 ‘사살’해도 된다는 김민수 국민의힘 최고위원의 최근 발언은 그 적의의 끝이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둘째, ‘정치와 종교의 유착’을 끊어내야 한다. 종교적 교리나 신념을 정치에 끌어들이는 것은 헌법 정신에 반하는 것이다. 종교는 자제하고 정치권은 정교분리의 금선을 지켜야 한다. 정치가 종교에 오염되면 종교가 정치세력을 움직이려는 기도를 차단할 수 없다. 통일교 로비사건이 보여주는 바다.
특히 성조기와 이스라엘기를 들고 거리에 나서는 극우 기독교 세력 뒤에 미일의 보수 세력이 손을 뻗치고 있다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국내정치에 외국을 끌어들이는, 참으로 볼썽사납고 위험 경박한 행동들이다.
셋째, ‘반역사의 정치’를 단호히 폐기해야 한다. 정치철학자 오크 숏(M J. Oakeshott)이 지적한대로 역사는 정치교육의 불가결한 부분이다. 역사야말로 국가와 국민형성의 토대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윤석열정권이 일제의 식민지배를 정당화하고, 한국의 독립을 강대국의 선물이라 강변한 것은 지극히 매국적이다. 소위 뉴라이트식 역사관을 정치적 이데올로기처럼 떠들어대는 것은 사실의 왜곡을 넘어 위험한 미래를 불러들이는 불온한 사상의 통로가 된다.
길잃은 보수, 큰 길로 나와 세계를 보라
내란특검이 6개월의 수사를 마치고 15일 그 결과를 발표했다. 국민의힘은 이제라도 12.3 내란과 탄핵국면에서의 반헌법적 행적을 국민 앞에 사죄해야 한다. 그 이전 윤정권의 폭정과 무능을 방조하고 불필요한 적의와 잘못된 신념, 반역사의 정치로 국정을 농단한 것 또한 철저히 자성해야 한다. 용산시대 구습의 정치를 혁신하지 않으면 인심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민주주의를 지키면서 점진적 개혁을 추진하는 것이 보수주의다. 대한민국 보수는 그 원점으로 돌아와서 한국의 좌표를 깊이 성찰해야 한다. 그리고 시대의 질문에 정직한 답을 내놓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