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연금 손자병법
OECD 연금통계에서 빠진 한국 퇴직연금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2년마다 발간하는 ‘한눈에 보는 연금(Pensions at a Glance) 2025’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의무적 연금 기여율은 9.0%로 OECD 평균 18.8%에 크게 못 미친다. 이 수치만 놓고 보면 한국의 노후소득보장체계는 주요 선진국에 비해 현저히 취약해 보인다.
그러나 이 비교에는 간과되기 쉬운 전제가 숨어 있다. OECD가 집계하는 ‘의무적 연금’에는 공적연금뿐 아니라 법이나 단체협약 등에 의해 강제로 가입하는 사적연금도 포함되는데 한국의 대표적 사적연금인 퇴직연금이 이 통계에서 제외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한 통계상의 누락이라기보다, 한국 퇴직연금제도가 국제적으로 ‘연금’으로 충분히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구조적 한계를 드러내는 결과라고 볼 수 있다. OECD가 한국의 퇴직연금을 연금으로 분류하지 않는 가장 핵심적인 이유는 연금수령이 제도적으로 정착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우리나라 퇴직연금은 DB형(확정급여형)과 DC형(확정기여형) 모두 적립 단계에서는 기업의 부담으로 운영되지만, 근로자가 퇴직하는 순간 금융기관으로 이전되고 이후의 인출은 개인 IRP 계좌를 통해 이루어진다. 법적으로는 55세 이후 연금수령이 가능하지만 현실에서는 IRP 자동이전 이후 일시금 수령이 사실상의 기본 경로로 작동하고 있다.
디테일 하지 못한 제도설계가 만든 일시금 편중
2024년 말 기준 55세 이상 퇴직자 중 연금으로 수령한 비중은 계좌 기준 13.0%에 불과하다. 더 심각한 문제는 55세 이전 퇴직 시 IRP로 이전된 퇴직급여가 은퇴 시점까지 유지되지 못하고 대부분 전액 해지된다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퇴직급여는 은퇴 이전에는 전액 해지되고, 은퇴 이후에는 일시금으로 인출되는 구조가 고착화돼 있다. 이런 상황에서 퇴직연금을 노후소득보장 수단으로 평가하기는 어렵다.
이러한 일시금 편중 현상은 개인의 선택이나 금융 이해도의 문제라기보다 디테일 하지 못한 제도 설계에서 비롯된 결과다. 우리나라 퇴직급여제도는 오랫동안 퇴직금이라는 후불임금 개념에 기반해 운영돼왔고 퇴직연금제도가 도입된 것은 2005년에 불과하다. 우리나라에서 사회보험이 충분히 확충되지 않았던 시기에는 이직 시 생계유지를 위해 퇴직급여를 활용하는 것이 불가피했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 이후 고용보험(실업급여) 도입 등 사회안전망이 확충되면서, 퇴직급여는 다시 근로자의 안정적인 노후자금으로 기능할 수 있는 제도적 여건을 갖추게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IRP에 대해 전액해지를 허용하고 은퇴 이후 수령방식을 연금과 일시금 중 선택에 맡긴 결과, 과거의 후불임금 인식이 제도적으로 고착화되고 말았다.
연금다운 연금으로의 전환 필요
퇴직연금을 연금다운 연금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인출기 제도에 대한 근본적인 개편이 필요하다. 첫째, IRP에서 일정 비율(예, 25%) 이내의 부분해지를 허용하고 불가피한 사유 없이 전액해지를 선택할 경우 그동안 부여된 세제혜택을 회수하는 장치를 도입해 전액해지를 억제해야 한다. 이는 은퇴 시점까지 적립금을 유지하도록 유도하는 최소한의 안전장치이다.
둘째, 은퇴 이후 인출 단계에서는 연금수령을 디폴트옵션으로 설정해야 한다. 행동경제학적으로 디폴트는 개인의 선택을 강제하지 않으면서도 실제 행동을 변화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정책 수단이며 이를 통해 연금수령 비율을 획기적으로 높일 수 있다.
아울러 퇴직연금 사업자들도 획일적인 인출기 연금상품에서 다양한 상품을 제공해 은퇴자의 소득 흐름과 위험선호를 보다 정교하게 반영할 필요가 있다.
퇴직연금에 대한 이러한 정책 개입을 사유재산 침해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그러나 퇴직연금은 광범위한 세제혜택이 수반되는 강제적 가입의 사적연금이며 근로자의 안정적인 노후생활을 목적으로 하는 공적성격이 강한 제도다. 정책당국의 개입은 충분한 정당성을 갖는다.
IRP 자동이전이라는 제도적 특성을 연금수령으로 자연스럽게 연결할 수 있도록 세제상 메리트와 디메리트를 정교하게 활용한다면 정책효과는 충분히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이는 국제사회에 새로운 K-퇴직연금 모델을 제시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퇴직연금 도입 20년이 지난 지금, 이제는 양적 확대를 넘어 연금다운 연금으로의 전환을 본격적으로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박준범
성균관대 겸임교수
한국은퇴연금아카데미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