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로
자동차산업, 중국을 넘어서는 길
지난 16일 EU(유럽연합)는 탄소중립 실현의 상징과도 같았던 ‘2035년 내연 기관차 판매 전면 금지’ 법안을 철회했다. EU 스스로 기후 정의 실천의 대표주자 자리를 내려놓은 셈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무엇보다 필수전제인 전기차로의 전환에서 차질이 빚어졌다.
유럽 자동차산업의 맹주인 독일마저 전기차 투자가 빛을 못 내면서 자칫 중국에 안방을 내줄 수도 있는 상황이 되었다. 유럽 자동차산업이 붕괴에 직면할 가능성마저 배제하기 어려워졌다.
중국 전기차의 공세는 매섭기 그지없다. 중국은 핵심 요소인 배터리 이차전지 생산에서 압도적 1위를 달리고 있다. CATL 하나의 매출이 한국 배터리 3사 모두를 합친 것보다 많다. 비야디(BYD)는 1분에 전기차 1대, 3초에 배터리 1개를 찍어낼 만큼 왕성한 생산력을 자랑한다.
중국 전기차의 공세는 한국 시장마저 잠식하고 있다. 시내를 주행하는 전기 버스의 절반 가까이가 중국산이다. 유리창 모서리를 살펴보면 BYD 마크를 흔히 발견할 수 있다. 품질도 우수한데 가격 또한 국산에 비해 저렴하다 보니 자연스레 일어난 현상이다.
중국 공세에 한국 자동차 생존 위한 출구찾기
과연 중국의 매서운 공세 속에서 한국 자동차산업이 살아남는 길은 무엇일까? 출구를 찾아 나선 공장이 있다. 기아자동차는 지난 14일 총 4조원을 투입한 목적 맞춤형 차량(PBV, Purpose Built Vehicle) 전용 공장 ‘이보 플랜트(EVO Plant)’를 처음 공개했다. 두번째 전기차 전용 공장이다.
이보 플랜트는 고객의 요구에 맞게 좌석 내부구조 도어 적재공간 등을 바꿔 주는 모듈형 전기차 생산을 목표로 삼고 있다. 휠체어 사용 고객에겐 휠체어용 공간을 만들어 주고, 배달 사업자에게는 좌석을 짐칸으로 개조해 줄 수 있다.
이보 플랜트는 진화를 뜻하는 ‘이볼루션(Evolution)’과 공장을 뜻하는 ‘플랜트(Plant)’의 합성어다. 한국 자동차산업의 진화 방향이 고객 맞춤형 생산임을 함축하고 있다.
전세계적으로 목적 맞춤형 차량(PBV) 시장에는 뚜렷한 선두 주자가 없다. 말 그대로 비경쟁 공간인 블루오션이다. 기아자동차는 비어있는 이 공간을 선점해 확실한 우위를 점하겠다는 계획이다.
고객 맞춤형 생산은 고도의 창의성을 요구한다. 다채롭고 수시로 바뀌는 고객의 요구에 맞게 숱한 아이디어를 쏟아내야 한다. 한국은 이 점에서 남다른 DNA를 품고 있음을 입증해 왔다. 현대로템의 전동차 사업 수주는 이를 뒷받침하는 사례 중 하나이다.
현대로템은 호주에서 경쟁자인 중국을 제치고 전동차 사업 수주에 성공했다. 그 과정이 눈물겹기 짝이 없다. 현대로템은 고객의 다양한 요구를 파악하기 위해 기관사노조 장애인단체 등 관련 단체와 500회가 넘는 간담회 자리를 가졌다. 수많은 건의사항이 쏟아졌다.
현대로템은 이들 건의사항을 최대한 수용했는데 그 수가 무려 2871건에 이르렀다. 해당 횟수만큼 설계를 변경·보완했다는 이야기이다. 한국 업체이기에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은 뭐든지 해 달라는 대로 해 준다는 인식을 더욱 굳히는 과정이었다.
자동차산업은 한국 경제의 기적을 상징하는 분야의 하나다. 1980년 신군부는 강제적인 중화학 구조조정을 추진하면서 현대가 자동차 사업을 GM 합작사인 대우자동차에 넘기도록 종용했다. 당시 신군부는 현대가 도무지 가망이 없어 보이는 자동차 사업을 포기하고 안정적인 발전설비 사업을 선택하리라 믿었다.
하지만 현대는 자동차 사업을 포기하지 않았다. 절대 지존의 위치에 있던 미국의 GM과 포드 등이 현대차를 발톱의 때로도 여기지 않던 시절이었다. 그러던 현대차가 GM과 포드 모두를 제치고 세계 3대 자동차 기업으로 우뚝 섰다. 독자적인 기술력을 갖추기 위해 끝도 없이 이어졌던 가시밭길을 내달려온 결과이다.
전혀 새로운 산업 생태계 구축해야
한국의 자동차산업은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이전에 없었던 전혀 새로운 영역으로 진출해 전혀 새로운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궁극적으로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자동차를 만드는 방향에서 전혀 새로운 산업 생태계를 구축하리라 믿는다. 바로 지금 그 지난한 역사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