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사·돌봄 노동, 경력으로 인정한다
서울시의회 조례 통과, 제도적 지원 출발
실효성 확보·민간 부문 협력 및 확산 과제
서울시의회가 가사와 돌봄 노동을 ‘경력’으로 인정하는 조례를 통과시켰다. 오랫동안 무급 노동으로 분류됐던 가사·돌봄 경험을 제도적으로 인정한 출발점으로 평가된다.
조례는 가사·돌봄 노동으로 경제활동을 중단했거나 해당 노동으로 인해 공식적인 직업 경력이 없는 시민 가운데 취업이나 창업을 희망하는 사람을 ‘경력보유시민’으로 규정했다. 이들에 대해 서울시장이 가사·돌봄 노동을 경력으로 인정하는 ‘경력인정서’를 발급할 수 있도록 했다.
경력인정서 발급 기준과 절차는 시장이 별도로 정한다. 가사·돌봄 노동의 내용과 기간을 어떻게 확인하고 산정할지 어떤 수준까지 경력으로 인정할지는 시행 규칙과 행정 지침에 담길 예정이다. 선언에 그치지 않고 실제 실행이 가능하도록 설계했다는 점에서 기존 논의에서 한단계 진전된 결과라는 평가를 받는다.
조례에는 제도의 운영과 기준을 심의할 ‘경력보유시민 권익증진위원회’ 설치 근거도 포함됐다. 위원회는 경력인정 기준과 지원정책을 점검하고 개선안을 제시하는 역할을 맡는다. 경력 인정 과정에서 불거질 수 있는 형평성 논란을 조정하는 장치다.
시의회 관계자는 “이번 조례의 핵심은 가사와 돌봄 노동을 개인의 희생이 아닌 사회가 필요로 하는 노동으로 공식화했다는 데 있다”면서 “경력단절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된 돌봄 노동을 경력으로 구조화함으로써 노동시장 재진입의 출발선을 제도적으로 마련한 것”이라고 말했다.
◆노동시장 재진입, 제도적 지원 = 이는 국내에서 최근 몇 년 사이 여러 지자체가 가사·돌봄 경력을 인정하는 조례를 마련해 온 흐름과 맥을 같이 한다.
성동구는 이미 조례를 통해 무급 돌봄 노동 경력인정서 발급 절차를 마련하고 일부 민간기업과 협력도 추진해 왔다.
국제적으로도 가사·돌봄 노동의 제도적 인정은 중요한 이슈다. 국제노동기구(ILO)는 2011년 ‘가사 노동자에 관한 조약’을 통해 가사노동자를 노동권 보호 대상에 포함시키도록 했다. 이를 통해 기존에 노동권 적용을 받지 못했던 이들에 대한 최소한의 보호를 권고하고 있다.
유럽연합 안에서도 가사·돌봄 노동을 사회적 경제 영역에서 경력으로 인정하고 그 가치를 평가하자는 논의가 진행돼 왔다. 돌봄 노동을 일종의 사회적 자산으로 바라보는 접근이다.
다만 조례가 곧바로 실질적인 변화로 이어질 지는 미지수다. 경력인정서가 민간 채용 현장에서 효력을 가질 수 있는 확고한 장치까지는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공공부문 활용을 넘어 민간 기업의 인식 변화를 이끌 보완책이 뒤따르지 않으면 제도가 형식에 그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배경이다.
최호정 서울시의회 의장은 “취업을 하려면 경력증명서가 필요한 것처럼 서울시장 명의의 경력인정서를 발급해 실제 재취업 과정에서 경력을 실질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한 것”이라며 “서울시의회가 만든 조례가 가사·돌봄 노동을 진짜 경력으로 바꾸는 출발점이 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제형 기자 brother@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