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전 칼럼
낮은 곳으로 임하소서
성탄절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지 2025년이 지났다. 성탄의 참뜻은 무엇인가? 성경 말씀으로 보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다(마태복음 25장40절)”를 꼽을 수 있다. 그 의미는 어려운 상황에 처한 사람들에게 사랑과 관심을 베푸는 것이 곧 나를 대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본질이자 지향점을 제시한다.
예수는 높은 자리에서 인간 위에 군림한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 이것은 종교적인 고백을 넘어 인류 사회 전체에 적용되는 변함없는 명제로 남았다.
예수의 위대함은 작은 자와 함께함에 있다. 높아짐이 아니라 스스로 낮아짐으로써 드러나는 역설이다. 오늘의 세계는 눈부신 물질적 성취를 이루었다. 하지만 정신세계를 더 깊은 죄의 수렁으로 빠뜨렸다. 정의로움의 결핍이다.
‘악의 평범성’을 설파한 독일 출신 정치 이론가 한나 아렌트는 “가장 위험한 악은 증오보다 인간에 대한 배려의 부재, 즉 타인의 고통을 생각하지 않는 마음과 태도에서 비롯된다” 했다. 성탄은 바로 이 삭막한 인간 세상을 향해 가장 근본적인 성찰을 요구한다.
그 성찰은 기독교와 기독교인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한국 기독교가 어디에 서 있는지 돌아보는 것이 먼저다. 세상은 기독교 신앙의 책임과 반성을 요구한다. 입으로는 예수의 사랑을 말하지만 행위는 그렇지 못하다. 갈수록 신뢰를 잃어가고 있다.
한국 기독교가 예수의 길을 잃고 방황하는 사이에 거짓 신앙이 세상을 뒤덮었다. 구원과 성공으로 현혹하며 세력을 확장했다. 지금도 진행 중인 통일교, 신천지 등이 일으키는 해악, 우리 현실이 그것이다. 이단과 사이비 종교의 본질은 인간을 신격화한다. 때문에 신의 권위를 대신할 세상 권력과의 결탁이 필요하다. 그 현상이 지금 한국 사회와 기독교 위기의 핵심이다.
기독교와 기독교인부터 근본적 성찰을
예수의 삶은 이런 권위를 부정했다. 성탄의 정신은 말 구유에서 태어나 가장 치욕스러운 십자가 형벌로 구원의 길을 연 데 있다. 예수의 길은 거창한 개혁도, 권력과의 투쟁도 아니었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을 사랑했다. 세상의 성공과 영향력이 아니라 인간 그 자체를 존귀하게 끌어안았다. 고통과 소외의 가장 낮은 자리를 찾아 인간의 존엄을 사랑으로 증명했다. 그 행위는 어떤 이념보다 강력했고, 어떠한 율법적 논증보다 설득력이 컸다.
마더 테레사를 생각한다. 그는 세상이 외면한 병들고 버려진 이들, 이름 없는 사람들 곁으로 찾아갔다. 죽어가는 노숙자의 손을 잡고, 그 이름을 불러주고, 깨끗한 침상에서 생을 마감하도록 그들의 곁을 지켰다.
테레사는 “우리는 위대한 일을 할 수 없다. 다만 위대한 사랑으로 작은 일을 할 뿐이다”는 말을 남겼다. 예수의 위대한 사랑에 순종했을 뿐이라는 겸손한 고백이다. 그가 성자여서가 아니라 낮아짐을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참 신앙은 교리를 얼마나 아는가가 아니다. 타인의 고통 앞에서 얼마나 책임 있게 반응하는가로 드러난다. 그것이 예수의 길이다.
예수의 길에서 바라보면 참 신앙과 거짓 신앙의 경계는 분명해진다. 참 신앙은 인간을 목적 그 자체로 대하지만 이단과 사이비 종교는 그 반대다. 인간을 교주와 조직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킨다. 참 신앙인은 고통받는 이 곁으로 내려가 연대하고 소통하지만 거짓 신앙인은 성공과 특권의 언어로 권력의 성을 쌓는다. 그리고 그 안에 사람을 격리하고 고립시켜 복종을 강요한다. 나아가 인간의 연약한 심성을 파고들어 신에 대한 두려움을 이용해 공포의 성에 가둔다.
성탄, 한 종교나 메시아의 탄생을 축하하는 절기가 아니다. 인류사와 세계 질서의 근본을 다시 묻는 사건이다. 인류가 갈망하는 하늘의 뜻, 진실한 신적 권위는 어디에서부터 연유하는지 반복되는 물음이다.
성경이 증언하듯 성탄의 자리는 궁궐도, 성전도 아닌 말구유였다. 가장 낮고 비루한 자리였다. 성탄은 묻는다. 더 높아질 것인가, 아니면 더 낮아질 것인가. 인간은 낮아질 때 비로소 서로를 살릴 수 있다. 이 진실 앞에서 신앙인과 비신앙인 모두는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한다. 그 성찰이 시작되는 자리에서, 성탄은 비로소 현재형이 된다.
고립을 넘어 함께 가는 공동의 선 찾기
성탄은 12월 25일로 끝나지 않는다. 살아 숨 쉬는 희망의 언어다. 매일 새롭게 선택해야 할 삶의 방향이다. 낮은 곳으로 임한 성탄의 뜻이 구현되는 사회만이 절망을 넘어 희망으로 나아갈 수 있다. 예수의 생애에서 일관되게 드러나는 것은 연대의 서사다. 오늘의 우리는 초연결 사회에 살지만 더 깊은 고립의 늪에 빠져 있다.
문명이 만드는 인간의 소외는 더 확장될 수 밖에 없다. 성탄의 참뜻은 이 고립을 넘어 함께 가는 공동의 선을 찾는 것이다. 신앙적으로는 자기를 낮추고 비우는 성찰이며, 철학적으로는 타자를 배려하는 윤리적 통찰이다. 성탄은 우리에게 묻는다.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