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진단
중국의 EUV 도전과 AI 굴기, 한국 반도체의 미래는
중국의 국영 반도체 장비 기업인 상하이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SMEE)가 자체적인 극자외선(EUV) 노광장비 관련 특허를 출원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서방 세계의 반응은 양분되었다. 한쪽에서는 “수십 년의 노하우가 축적된 네덜란드 ASML의 아성을 중국이 단기간에 넘볼 수는 없다”며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현장의 엔지니어들과 전략가들의 눈빛은 달랐다. 이것은단순한 기술적 시도가 아니라 중국이 국가의 명운을 걸고 던진 거대한 도박이자, 미국 주도의 질서에 균열을 내기 위한 ‘마지막 퍼즐’ 맞추기라는 사실을 감지했다.
EUV 장비는 인류가 만든 기계 중 가장 복잡하고 정밀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현재 전세계에서 오직 네덜란드의 ASML만이 이 장비를 만들 수 있다. 미국이 대중국 반도체 제재의 핵심 타깃으로 삼은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EUV 없이는 7나노 이하의 첨단 칩을 경제적으로 양산할 수 없고, 첨단 칩 없이는 중국의 AI 굴기도 군사적 현대화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미국제재를 생존문제로 받아들이는 중국
하지만 중국은 이 상황을 기술적 난관이 아닌 ‘생존투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시진핑 주석이 입만 열면 강조하는 ‘과학기술 자립자강(自立自强)’은 단순한 정치적 레토릭이 아니다. 미국의 기술 봉쇄망인 ‘마당은 좁게, 담장은 높게(Small Yard, High Fence)’ 전략에 갇혀 질식사하지 않겠다는 처절한 몸부림이다. 중국 지도부는 반도체 기술자립 없이는 ‘중국몽(中國夢)’도, 2049년 세계 최강대국 도약도 물거품이 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중국의 EUV 기술 시도를 ‘맨땅에 헤딩’이라고 비웃는 것은 위험하다. 중국에는 서방 국가들이 갖지 못한 강력한 무기가 있다. 바로 ‘신형 거국체제(新型擧國體制)’다. 과거 원자폭탄을 만들고 유인 우주선을 쏘아 올렸던 것처럼 국가가 목표를 정하면 가용 가능한 모든 자원과 인력을 무제한으로 쏟아붓는 시스템이다. 시장의 논리나 효율성은 차순위다. 목표 달성만이 유일한 선(善)이다. 중국은 지금 반도체 펀드인 ‘대기금’을 통해 수백조원을 살포하고 있다. 실패해도 책임을 묻지 않는다. 오히려 실패의 경험을 데이터로 축적한다.
물론 중국이 당장 내일 ASML과 동급의 장비를 내놓을 수는 없다. 하지만 중국의 목표는 ‘세계 최고’가 아니라 ‘쓸 만한’ 장비다. ASML 성능의 100%가 아니더라도, 70~80% 수준의 독자 장비만 만들어낸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멀티 패터닝 기술 등을 조합해 수율은 좀 낮더라도 7나노, 5나노 칩을 자체 생산할 수 있는 길을 열게 된다.
이는 미국의 제재를 무력화하고, 독자적인 ‘레드 서플라이 체인(Red Supply Chain)’을 완성한다는 의미다. 화웨이가 최근 자체 개발 칩을 탑재한 스마트폰을 내놓으며 미국의 제재를 비웃은 것이 그 예고편이다.
더욱 두려운 것은 이러한 하드웨어의 자립 시도가 중국의 AI 역량과 결합했을 때 발생할 폭발력이다. 흔히 중국의 반도체 기술이 뒤처져 있다고 해서 AI 기술까지 얕잡아보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큰 오산이다. AI의 3대 요소는 알고리즘, 컴퓨팅 파워(반도체), 그리고 데이터다. 중국은 컴퓨팅 파워에서만 약점을 보일 뿐 나머지 두 영역에서는 이미 세계 최정상급이다.
중국은 14억 인구가 24시간 뿜어내는 방대한 데이터를 가지고 있다. 개인정보보호 규제가 엄격한 서구권과 달리 중국은 이 데이터를 AI 학습에 쉽게 활용한다. 안면인식 음성인식 기술은 이미 세계 최고 수준이며 틱톡 바이두 알리바바 텐센트 화웨이 등 빅테크 기업들은 각자의 거대언어모델(LLM)을 개발해 산업 전반에 적용하고 있다. 스마트시티 자율주행 스마트팩토리 등 AI가 적용될 수 있는 거대한 테스트베드(실험장)가 중국 전역에 깔려 있다.
만약 중국이 EUV 기술 확보를 통해 하드웨어의 제약이라는 마지막 족쇄를 풀어버리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값싼 자체 생산 AI 칩에 방대한 데이터를 결합한 중국산 AI 솔루션이 전세계, 특히 ‘글로벌 사우스’ 시장을 휩쓸게 될 것이다. 이는 단순히 산업경쟁력을 넘어 미국의 기술패권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이자 새로운 국제 질서의 태동을 알리는 신호탄이 될 것이다.
‘골든타임’ 끝자락에 선 한국 반도체
더 큰 문제는 한국이 미중 기술패권 전쟁의 최전선에 끼어 있는 ‘샌드위치’ 신세라는 점이다. 우리는 안보와 기술동맹은 미국에 의존하면서, 먹거리는 중국 시장에서 해결해 온 ‘안미경중(安美經中)’의 시대를 살아왔다. 하지만 이제 그 시대는 끝나가고 있다. 중국은 한국 없이도 살 수 있는 ‘반도체 굴기’를 완성해 가고 있다.
지금 한국 반도체 산업은 ‘골든타임’의 끝자락에 서 있다. 이 시간이 지나면 우리는 중국이라는 거대한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거나, 기술 종속국으로 전락할 수 있다.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서는 냉철한 현실 인식과 뼈를 깎는 혁신이 필요하다.
첫째, ‘초격차’의 정의를 다시 써야 한다. 단순히 D램이나 낸드플래시의 적층 단수를 높이는 식의 기술격차는 금방 따라잡힌다. 중국이 흉내 낼 수 없는, 아니 미국조차 우리 없이는 AI 산업을 유지할 수 없는 ‘대체 불가능한 기술’을 확보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AI 반도체다. 고대역폭 메모리(HBM) 시장에서 한국 기업들이 선전하고 있는 것은 고무적이다. 하지만 여기에 만족해서는 안된다. 메모리와 연산 기능을 하나로 합친 PIM(Processing-In-Memory), 인간의 뇌를 모방한 뉴로모픽 칩 등 차세대 반도체 기술을 선점해야 한다. 메모리반도체의 한계를 넘어 시스템반도체 팹리스 파운드리를 아우르는 종합적인 생태계 경쟁력을 갖춰야 한다.
둘째, 인재전쟁에서 승리해야 한다. 중국은 지금 전세계의 반도체 인재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이고 있다. 연봉의 몇 배를 주는 것은 기본이고, 주거와 교육까지 책임지며 한국의 퇴직 엔지니어들을 스카우트하고 있다. 우리 엔지니어들이 한국에서 일하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고, 정당한 대우를 받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대학의 반도체학과 정원을 늘리는 수준을 넘어 기초과학 분야에 대한 국가 차원의 장기적이고 파격적인 투자가 필요하다. 유럽의 작은 국가들도 보유하고 있는 노벨상을 한국에서 아직 하나도 없다는 것은 깊이 반성해봐야 할 일이다.
셋째, 정부의 역할이 바뀌어야 한다. 기업에게 “알아서 잘하라”고 맡겨두거나, 세액 공제 몇 퍼센트 해주는 식의 소극적 지원으로는 부족하다. 반도체는 이제 기업 간의 경쟁이 아니라 국가 대항전이다. 우리 정부도 반도체 전력망 확충, 용수 공급, 규제 철폐 등 인프라 지원에 사활을 걸어야 한다. 외교적으로는 미국과의 동맹을 굳건히 하되 중국시장을 완전히 잃지 않도록 정교한 ‘디리스킹(위험 완화)’ 전략을 구사해야 한다.
넷째, 중국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우리는 중국을 혐오하거나 무시하는 감정에 치우쳐 중국의 실체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중국의 기술발전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패착이다. 그들의 전략을 현미경처럼 들여다보고, 그들이 무엇을 원하고 어디가 아픈지 정확히 파악해야 협상력을 가질 수 있다.
기업생존 넘어 한국의 미래 걸린 문제
중국의 EUV 장비 특허 출원은 우리에게 울리는 거대한 경종이다. 머지않은 미래에 우리는 중국산 반도체가 탑재된 AI 로봇이 우리 일자리를 대체하고, 중국산 AI 플랫폼이 우리의 데이터를 지배하는 세상을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
한국 반도체의 신화는 과거의 영광일 뿐 미래를 보장해주지 않는다. 모든 것을 원점에서 재검토하며 전력 질주해야 한다. 이것은 기업의 생존을 넘어 대한민국의 미래가 걸린 전쟁이다. 우리는 이 전쟁에서 반드시 이겨야만 한다. 그리고 이길 수 있는 힘은 아직 우리 손안에 있다. 그 힘을 놓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