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 1온스가 원유 1배럴보다 비싸졌다

2025-12-29 13:00:03 게재

실물 부족·중국 프리미엄

구조적 요인이 상승폭 키워

금과 은 가격이 연일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다. 금은 온스당 4500달러 선을 넘어섰고, 은은 80달러를 돌파하며 선물시장 기준으로 원유 1배럴 가격을 웃도는 이례적인 상황이 연출됐다.

은 1온스 가격이 원유 1배럴보다 비싸진 것은 1980년대 이후 좀처럼 보기 어려운 현상이다.

시장에서는 이번 금·은 랠리를 단순한 지정학적 불안이 아니라, 실물 수급과 제도적 요인이 맞물린 구조적 변화로 해석하고 있다.

지정학적 긴장은 분명한 촉매다. 중동과 중남미를 둘러싼 군사·외교적 불확실성이 이어지고, 미국의 무역 압박과 제재 리스크가 확대되면서 안전자산 선호가 강화됐다.

블룸버그는 지정학적 긴장 고조와 달러 약세, 연말 유동성 축소가 겹치며 귀금속 가격 변동성이 크게 확대됐다고 전했다. 그러나 이번 상승의 배경은 보다 구조적이다. 통상 금 가격은 실질금리가 하락할 때 강세를 보이지만, 최근에는 실질금리가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음에도 금값이 급등하고 있다.

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교수는 최근 칼럼에서 “금 가격 상승은 인플레이션 공포라기보다, 미국 국채와 제도적 신뢰에 대한 의문이 반영된 신호”라고 분석했다. 이자를 지급하지 않는 금이 다시 주목받는 것은, 정치적 개입 위험이 적은 자산에 대한 선호가 커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은의 가격 움직임은 금보다 훨씬 거칠다.

은은 안전자산 성격과 함께 산업용 금속이라는 이중적 속성을 지닌다. 태양광, 전기차, 반도체, 데이터센터 등 신산업 확산으로 구조적인 수요가 늘어나는 가운데, 실물 은 공급은 이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특히 최근 가격 급등 과정에서는 선물, 상장지수펀드(ETF) 등 실물을 수반하지 않는 거래가 크게 늘었다. 이는 이른바 종이 거래(paper trading)로, 실제 은을 보유하지 않고 가격 변동에만 베팅하는 방식이다. 문제는 이 같은 종이 거래가 쌓인 뒤, 일부 투자자들이 만기나 위험 관리 차원에서 실물 인도를 요구하면서 발생했다. 종이 거래로 형성된 포지션을 실물로 전환하려는 수요가 한꺼번에 몰리자, 즉시 인도 가능한 은 재고가 부족해졌고 가격 상승폭이 급격히 확대됐다.

은은 순수 광산 생산이 거의 고갈돼 구리·금·아연 채굴 과정의 부산물로 공급되는 경우가 많아, 가격이 올라도 단기간에 공급을 늘리기 어려운 구조다. 이로 인해 은 가격은 금보다 변동성이 클 수밖에 없다는 평가가 나온다.

중국 수요도 이번 가격 상승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변수다. 상하이 시장에서 거래되는 금과 은은 국제 시세 대비 높은 프리미엄을 유지하고 있다. 이는 투기적 과열이라기보다 구조적 요인에 가깝다. 중국은 자본 이동을 엄격히 통제하고 금·은 수입에 쿼터를 적용하고 있어, 해외 가격과의 차익 거래가 제한된다. 여기에 부동산 침체와 주식시장 부진 속에서 가계와 기관의 실물 귀금속 수요가 늘며, 국내 수요가 공급을 웃도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이 같은 구조는 중국 본토에서 거래되는 유일한 순은 상장 개방형 펀드(LOF)에서도 단적으로 드러난다. 해당 상품은 최근 국제 은 가격 대비 60%를 넘는 프리미엄, 장중에는 70%에 육박하는 가격 괴리를 기록하기도 했다. 운용사는 과도한 괴리를 경고하며 반복적으로 위험 공지를 내고 매수 한도를 제한했지만, 해외 은 ETF에 직접 투자할 수 없는 환경에서 제한된 투자 수단에 자금이 몰리며 프리미엄은 쉽게 해소되지 않고 있다.

블룸버그는 최근 귀금속 시장에 대해 “중앙은행의 금 매입 확대와 실물 시장의 제약, 국채와 통화에 대한 신뢰 약화가 동시에 작용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는 금과 은의 기록적인 상승이 일시적 불안 심리를 넘어, 글로벌 자산 배분의 기준이 서서히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은 1온스가 원유 1배럴보다 비싸진 현상은 단순한 가격 역전이 아니라, 세계 금융 질서를 바라보는 투자자들의 시선이 달라지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으로 해석된다.

양현승 기자 hsyang@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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