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트럼프발 유럽 경고가 한국 외교안보에 던지는 교훈
지난해는 트럼프의 관세전쟁과 미국 우선주의가 세계를 뒤흔든 한해였다. 동맹국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우리 정부는 미측 요구에 상호 국익에 부합하는 원칙적 타협점을 찾으며 위기를 넘겼다. 새해는 실행의 시간이다. 동맹과 안보 운영에 혁신적 사고 전환이 필요하고 구체적 성과로 보여줘야 할 때다.
주목할 것이 있다. 트럼프행정부가 지난해 국가안보전략에서 나토동맹 파트너인 유럽의 ‘문명적 소멸’ 위험까지 경고하며 근본적 문제들을 지적했다는 점이다. 미 행정부는 가치보다 이익 기반 거래전략과 유럽연합(EU)의 다자주의 문제를 제기했다. 유럽이 러시아와 전략적 안정을 재확립하고 안보의 일차적 책임을 지는 자립적 동맹이 되도록 하겠다는 것이 우선순위라고 밝혔다. 동맹에 대한 미국의 시각이 근본적으로 바뀌고 있다는 신호다.
유럽은 안보와 경제 양면에서 약화된 모습을 드러냈다. 자신들의 지역안보에 직결된 우크라이나 전쟁 종식 협상에서조차 배제되어 있다. 내부 정치적 분열로 일치된 대러 전략이 없기 때문이다. 러시아 동결자산 이용, 대러 제재, 우크라이나 경제 지원 같은 카드를 쥐고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지난 30년간의 정책 기조도 문제였다. 경제적 상호의존이 평화와 변화를 보장한다는 논리 아래 전략적 경쟁자인 중국과의 투자 교역을 확대했다. 동시에 미국에 대한 안보 의존 속에 자체 군사역량은 등한시했다. 안보는 미국에 맡기고 경제적 이익만 추구한 대가를 지금 치르고 있는 셈이다.
드라기의 ‘중간기술 함정’은 우리도 해당
마리오 드라기 전 유럽중앙은행 총재는 2024년 9월 ‘유럽 경쟁력의 미래’ 보고서를 통해 구조적 문제를 날카롭게 지적했다. EU 회원국 간 합의 도출이 지나치게 느리고 각종 규제 아래 신속한 정책 대응이 불가능해 산업 경쟁력이 떨어졌다는 것이다. 드라기는 전략적 우선순위 문제에 가중다수결 확대를 제안했지만 회원국들의 저항으로 진전은 더디다.
경제·산업면에서는 유럽이 ‘중간기술 함정’에 갇혔다고 진단했다. 자동차 등 중간기술 산업에는 투자하지만 소프트웨어와 연구개발 같은 무형자산 투자는 미국에 크게 뒤처져 저성장의 늪에 빠졌다. 디지털 혁명의 적기를 놓쳤고 혁신을 상업화로 전환하는 데 실패했다.
규모 확장을 원하는 혁신기업들은 단계마다 방해받으며 유럽을 떠나고 있다. 러시아 가스 의존 중단 이후 대체에너지 부족으로 높은 에너지 가격에 시달리고 중국의 국가 보조금 기반 청정기술 분야에서도 경쟁력을 잃었다. 고령화와 출산율 저하로 인한 노동력 감소, 고급 인력의 해외 유출 문제도 심각한 수준이다.
유럽의 교훈은 명확하다. 미국은 더 이상 동맹과 세계안보를 혼자 떠맡지 않을 것이다. 공유하는 가치만으로 동맹이 자동적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자체의 안보역량, 기술·경제 경쟁력, 정치적 안정과 실행력을 갖춘 전략이 있어야 한다. 스스로 가치를 증명하지 못하는 동맹은 언제든 재평가 대상이 될 수 있다.
우리도 한미 정상 간 합의를 구체화하면서 국익에 기반한 정교한 협상을 통해 동맹 협력의 실질적 가치를 입증해야 한다. 조선 에너지 반도체 등 호혜적 투자사업으로 무역 불균형을 해소하고 핵잠수함 도입 등 자체 안보역량을 확충해야 한다. 북핵 문제와 대북정책에서 우리 전략을 설득력 있게 제시해 한반도 안보의 안정적 구도를 구축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다.
드라기 보고서가 지적한 ‘중간기술 함정’은 우리에게도 의미 있는 경고다. 핵심 공급망에서 중국 의존도를 줄이고 반도체 인공지능 양자컴퓨팅 제약 등 첨단기술 분야에서 미국과 협력을 심화해 대체불가능한 파트너가 되어야 한다. 기술 경쟁력이 곧 외교 협상력이 되는 시대다.
국내 정치 안정도 빠뜨릴 수 없다. 12.3 계엄사태로 인한 정치적 혼란을 헌법적 절차에 따라 안정 속에 신속히 해결하는 성숙한 민주주의 역량을 보여줘야 한다. 예측 가능한 정치제도 운영은 대외적 신뢰를 굳건히 하는 기반이다.
외교안보력 발휘하면 변화의 기회 열려
능동적 외교로 다층적 안보관리 네트워크도 구축해야 한다. 일본과의 전략적 제휴를 강화하고 중국 러시아와의 대화와 관계 관리를 통해 전략적 유연성을 확보해야 한다. 어느 한쪽에만 의존하는 외교는 위험하다.
우리가 외교안보력을 효과적으로 발휘한다면 새해에 변화의 기회도 열릴 수 있다. 유럽이 우크라이나를 계속 지원하면 푸틴은 기약 없는 전쟁을 지속할지, 중국에 더 종속돼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 중국 국내경제 위기가 심화되면 시진핑도 국제 문제 접근 방식을 재고할 수 있다. 북한은 러시아에서 중국으로 비중을 옮기며 남북교류 가능성을 재고할 수도 있다. 트럼프가 대외적으로 충격적인 조치를 자제할 가능성도 열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