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팡’ 사태…기업가정신 잃은 ‘벤처신화’의 민낯
국민지원과 초심 외면 … 많은 사고에도 매출확대·이익만 추구
벤처인들 ‘책임있는 자세’ 주문 … 벤처육성 의지 꺾일까 걱정
“정부 유니콘정책 문제” … 세금으로 시장독과점기업 육성 비판
김범석 쿠팡 이사회 의장이 국민의 공분을 샀다. 그간 쿠팡에서 발생한 사건·사고에 대해 진정어린 사과는 없고 책임회피로 일관하고 있어서다. 한때 칭송받던 벤처신화가 ‘공공의 적’이 됐다. 쿠팡 사태는 배달의민족 카카오에 이어 벤처기업 인식에 악영항을 끼치고 있다.
국민들은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 벤처기업계에도 실망하며 ‘기업가정신’이 무엇인지를 되묻고 있다. “벤처신화도 결국엔 이익만 쫓는 욕망”이라는 비난까지 나오고 있는 형국이다.
이는 막대한 예산을 투자하는 벤처정책 문제로 비화되고 있다. 유니콘 육성정책은 쿠팡사태와 직접 연계돼 있다. 유니콘은 시장독과점을 전제로 한 것인데 정부가 세금으로 독과점기업을 육성하는 게 맞느냐는 지적이다.
◆한국벤처가 낳은 혁신사례 = 2021년 벽두부터 산업계가 들썩였다. 쿠팡이 뉴욕증권거래소(NYSE) 상장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3월 11일(현지시간) 쿠팡이 미국증권시장에 입성하자 국내가 환호했다.
벤처업계 주요 단체들은 “국내 스타트업이 세계 최대 자본시장에서 가치를 인정받은 기념비적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벤처기업협회는 쿠팡 상장을 ‘2021년 벤처·스타트업 10대 뉴스’ 중 하나로 선정했다. 벤처업계는 “쿠팡 같은 기업이 한국증시를 외면한 것은 복수의결권 부재, 경직된 노동규제 등 ‘갈라파고스 규제’ 때문”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실제 쿠팡 상장은 국내 벤처기업에 대한 복수의결권 도입 논의를 촉발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벤처투자업계와 중소벤처기업부도 “자본의 국적보다는 해당 기업이 국내산업에 미치는 긍정적 영향에 주목해야 한다”며 “쿠팡을 단순한 미국기업이 아닌 한국벤처가 낳은 혁신사례로 보아야 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일각에서 제기된 미국상장에 따른 국부유출 등 우려를 방어하며 쿠팡에 힘을 실어준 것이다.
김범석 쿠팡 Inc. 의장 역시 상장 후 미국현지 주요 언론과 인터뷰에서 “고객과 주주를 위해 진정한 가치를 만드는데 집중해 왔다”면서 “조달한 자금으로 한국 전지역에 투자해 좋은 일자리를 창출하고 기술투자를 멈추지 않겠다”고 밝혔다. 김 의장이 창업 때부터 ‘벤처정신’을 강조해 왔기에 ‘유니콘 벤처’의 탄생에 기대가 컸다.
김 의장은 “한국경제에 기여하고 오랫동안 사랑받는 ‘뿌리 깊은 벤처’를 만드는 것이 꿈”이라고 말해왔다. “단순히 매출을 늘리는 것보다 고객이 감동하는 문화를 만들고 직원들이 자부심을 느끼는 기업문화를 구축하는 게 성장의 핵심”이라고 주창했다.
◆김범석 의장의 두얼굴 = 하지만 지난해 11월 3370만명의 개인정보 유출사태 이후 상황은 급변했다. 김 의장이 당당하지 못하고 책임을 회피하는 태도로 원성을 샀다. 그동안 해온 발언과는 전혀 다른 모습은 큰 실망감을 안겨줬다. 김 의장이 사태발생 한달여 만인 지난해 12월 28일 첫 사과문을 내놨지만 국민의 비난은 줄어들지 않는 이유다.
소상공인연합회는 6일 쿠팡의 불공정 행위와 실질적인 피해보상을 촉구했다. 연합회는 성명서에서 “역대급 통제시스템 붕괴 앞에서도 쿠팡이 보여주고 있는 모습은 ‘오만’ 그 자체”라고 비판했다.
연합회는 “쿠팡이 지금껏 소상공인들을 쥐어짜는 방식으로 일관해 왔다”며 “쿠팡의 영업방식은 혁신이 아니라 명백한 ‘약탈’”이라고 주장했다. △상품 페이지를 가로채는 ‘아이템 위너’ △알고리즘을 조작해 제 배만 불리는 ‘PB상품 우대’ △입점업체에 손해를 강요하는 ‘가격 압박’ 등의 사례를 소개했다. 연합회는 △쿠팡 과실로 인한 입점 소상공인에 대한 피해보상 △입점 소상공인들에 대한 불공정시스템 중단 △국회의 쿠팡 국정조사 즉각 실시 등을 촉구했다.
벤처인들도 쿠팡의 사실상 총수인 김 의장에게 책임있는 자세를 주문하고 있다. 벤처업계 핵심관계자는 “그동안 주창해온 ‘고객감동’ ‘벤처정신’은 어디 갔느냐”며 김 의장이 귀국해 국민과 소통할 것을 요구했다.
쿠팡은 미국법인(쿠팡 Inc.)이기 이전에 대한민국 국민세금으로 지원한 각종 정책혜택을 받으며 성장한 기업이다. 매출도 대부분 한국에서 발생하고 있다. 지난해 1~3분기 누적매출(35조6000억원) 중 로켓배송 로켓프레시 마켓플레이스 등 국내매출 비중이 86.5%(29조5900억원)다. 해외와 신사업(대만 로켓배송, 쿠팡이츠, 파페치 등) 매출은 13.5%(4조6318억원)에 불과하다. 쿠팡 Inc.는 한국쿠팡 지분 100%를 보유하고 있다. 쿠팡 Inc. 이사회 의장이자 최고경영자인 김 의장이 현 쿠팡사태의 책임자인 것이다.
김 의장은 주식의결권으로도 쿠팡의 지배자다. 현재 쿠팡 주요주주는 △소프트뱅크 비전펀드(SBIA) 15.9% △김범석 의장 8.8% △베일리기포드 8.2% △블랙록 3.5% △모건스탠리 3.4% △기타 기관 및 소액주주 60% 등이다. 김 의장은 지분 8.8%로 독점적인 경영권을 행사하고 있다. 김 의장이 일반 주식보다 의결권이 29배나 높은 ‘클래스 B’ 주식을 전량 보유한 덕이다. 차등의결권(29배)이 부여된 김 의장 주식 의결권은 약 74%로 압도적이다.
오동윤 동아대 교수는 “김 의장의 모습에서 기업가정신을 찾아볼 수 없다”며 “쿠팡은 혁신을 앞세워 매출만 키우면 된다는 전형적인 구시대적 기업”이라고 지적했다.
◆길어지는 벤처업계 침묵 = 쿠팡사태 불씨는 정부의 유니콘 육성정책으로 번졌다. 요지는 국민세금을 시장독과점을 목표로하는 플랫폼 유니콘기업을 지원하는데 사용돼야 하느냐는 것이다. 유니콘기업은 기업가치가 10억달러(약 1조원) 이상인 비상장 창업기업을 의미한다.
대한상의에 따르면 2025년 기준 전세계 유니콘기업은 총 1278개다. 미국기업이 56.2%(717개)로 과반을 차지했다. 이어 중국 151개, 인도 64개, 영국 56개 등 순이다. 한국은 1.0%(13개)로 11위에 그쳤다. 두나무 여기어때컴퍼니 야놀자 비바리퍼블리카 퓨리오사AI 딥엑스 업스테이지 리디 컬리 무신사 당근마켓 등이 유니콘기업이다.
국내 유니콘기업의 특징은 △유통플랫폼 △내수중심이다. 제조업 기반 유니콘은 드물다.
독일이나 미국기업처럼 세계시장으로 나가지 못하고 국내시장 독과점에 집중하고 있다. 유니콘기업이 오히려 국내 제조업을 망치고 국내시장을 해외에 판다는 비난을 받는 배경이다. 배달의민족과 쿠팡은 유니콘 육성정책의 목적과 방향에 문제를 제기한 계기가 됐다.
현직 벤처기업 대표 A씨는 “국민세금으로 쿠팡같은 기업을 키워서야 되겠느냐”며 “1조원짜리 기업 한 개보다 1000억원 기업 10개, 100억원 기업 100개가 한국경제를 위해 더 좋다”고 말했다.
벤처업계는 김 의장과 쿠팡에 대한 불신이 벤처기업에 대한 부정적 인식 확산으로 이어질까 걱정하고 있다. 벤처업계 핵심관계자는 “김 의장의 태도는 분명 문제가 있다”면서도 “대부분 벤처기업은 쿠팡과 다르다. 쿠팡사태로 벤처육성정책이 꺽이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벤처업계가 내부 정화노력 부족도 벤처기업 불신을 부추기고 있다. 쿠팡사태에 벤처업계는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배달의민족 카카오 등이 사회갈등을 야기시켰을 때도 벤처업계는 침묵했다. 일부에서는 신기술 규제 타령만 내놓았다.
오 교수는 “벤처기업이 미래의 기업군으로 신뢰받으려면 벤처인들이 매출확대에만 매몰돼 기업가정신을 잃지 말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김형수 기자 hskim@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