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시평
더욱 거칠어진 지정학의 시간
신자유주의는 1980년대 초 미국 레이건행정부와 영국 대처정부의 출범을 기점으로 부상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전까지 세계 경제를 지배했던 이념적 사조였다. 규제완화와 민영화, 재정긴축, 개방확대, 노동시장 유연화 등을 특징으로 하는 신자유주의는 ‘전능한 시장’이라는 토대 위에 지어진 집이었다.
신자유주의는 불평등 심화와 금융 불안정이라는 치명적 부작용을 낳았지만 요즘의 세상을 보면 신자유주의 시대가 어떤 면에서는 그리울 지경이다. 그래도 ‘경제적 효율성’이라는 힘이 작동했기 때문이다.
공급망과 에너지, 기술패권까지 포함한 지정학의 확장
미국이 베네수엘라를 침공해 마두로 대통령을 체포했다. 마두로를 미국 법정에 세운 트럼프 대통령은 “콜롬비아에 대한 군사작전도 좋은 아이디어이고, 쿠바는 붕괴할 것이다”라는 발언을 내놓았다. 현실론에 입각한 평가와는 별개로 국제법과 주권에 기반한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도 지속되고 있다. 이 전쟁이 4년 가까이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주가가 크게 레벨업 된 한국 방산주들의 약진은 시대의 퇴행을 보여주는 그림자일지도 모른다. 지정학의 시대가 열렸다. 과거에는 지정학을 규정하는 요인이 영토와 군사 등이었다면 오늘날에는 이에 더해 공급망과 에너지, 기술패권까지 포함된 개념으로 확장됐다.
지정학적 긴장은 이미 금융시장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한국은 2016년 사드(THAAD, 고고도미사일방어체제) 배치 발표 이후 중국의 경제적 보복에 노출됐다. 주식시장에서는 중국 사업에 대한 노출도가 컸던 화장품과 여행, 엔터테인먼트 관련주들이 약세를 면치 못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도 유럽증시에 부정적 영향을 주고 있다. 2022년 2월 전쟁 발발 이후 모건스탠리캐피털인터내셔널(MSCI) 유럽지수는 36.2% 상승했는데, 이는 극동의 72.6%와 북미의 60.2% 상승률(이하 2026년 1월 5일까지의 등락률)을 크게 밑도는 성과다.
유럽 증시의 상대적 부진을 전쟁이라는 단일 요인으로만 환원할 수는 없지만 이제 적대국이 된 러시아에 대한 과도한 에너지 의존이 유럽 경제를 구조적으로 취약하게 만들었다는 평가는 결코 과도하지 않다. 이는 경제 효율성만을 기준으로 구축된 공급망과 에너지 구조가 지정학적 갈등이 폭발하는 국면에서는 오히려 심각한 리스크로 전환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과거에는 기업의 실적과 밸류에이션, 거시경제 지표만으로 투자 판단을 내려도 문제가 없었지만 이제는 충분하지 않다. 지정학은 산업의 흥망과 자본의 이동 경로를 직접적으로 바꾸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특정 국가와의 외교 관계 변화, 제재와 보조금 정책, 공급망 재편 여부에 따라 기업의 경쟁력과 이익 전망이 단기간에 달라진다. 반도체·방산·배터리처럼 국가 전략과 밀접하게 연결된 산업일수록 이러한 영향은 더욱 뚜렷하다.
시장은 더 이상 ‘효율적인 가격’만으로 움직이지 않고 정치와 안보, 기술패권을 둘러싼 힘의 균형을 함께 반영한다. 결국 투자자는 개별 기업의 펀더멘털 분석을 넘어, 그 기업이 어떤 지정학적 질서 속에 놓여 있는지를 함께 고민해야 한다. 결국 투자에 있어 지정학을 고려한다는 것은 ‘평화 배당금(Peace Dividend)’이 사라진 데 따른 비용을 계산하는 과정에 다름아니다.
경제논리 넘어서는 지정학적 격변의 흐름 읽어야
대만해협의 긴장은 향후 동북아 자산시장의 성과에 결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변수다. 이는 반도체 공급망의 안정성, 대만을 대체할 수 있는 생산기지로서 한국이 가지는 메리트, 한국에게 요구되는 군사적 역할, 주한미군의 직접적 분쟁 개입 여부 등이 결부된 매우 복잡한 고차방정식이다. 효율성이 사라진 자리를 안보와 생존의 논리가 채우고 있는 지금, 투자자는 경제논리를 넘어서는 지정학적 격변의 흐름을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