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소한의 사다리 회복 시켜야
태국에서는 정치적 사건이 환멸을 증폭시켰다. 2024년 8월 7일 헌법재판소의 개혁 성향 미래전진당 해산 결정 이후 “선거에서 이겨도 체제는 바뀌지 않는다”는 체념과 분노가 동시에 커졌다. 이 결정은 알자지라와 프랑스24가 같은 날 속보로 전하며 청년 정치의 좌절과 거리 시위 재점화를 연결지었다.
아세안 전반의 공통점은 안전망의 취약성이다. 주거·연금·실업을 완충할 제도가 약한 상황에서 교육 예산 삭감이나 민주주의 후퇴는 곧바로 ‘미래 상실’로 인식된다. 그래서 이 지역의 MZ 저항은 생활비·부패·권위주의를 동시에 겨냥하는 다층적 성격을 띤다.
유럽에서 환멸의 경제는 주거라는 단일 축을 중심으로 응축됐다. 스페인에서는 2024년 10월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 등 40여 개 도시에서 임대료 폭등과 주택 부족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이 장면을 로이터와 르몽드가 보도하며 “임대료가 삶을 멈춘다”는 청년층의 구호를 전했다. 이후 스페인 정부는 2026년 1월 방 단위 임대 상한과 중기 임대 악용 차단을 포함한 규제 강화를 예고했다.
아일랜드에서는 ‘Raise the Roof’ 집회가 2024~2025년 반복되며 주거 위기가 정치 의제로 고착됐다. 프랑스에서는 2023년 봄 시작된 연금개혁 반대 시위에 학생·청년층이 대거 참여했다. 유로뉴스와 프랑스24는 이를 “연금 문제가 아니라 미래의 권리에 대한 저항”으로 해석했다. 여기에 ‘미래를 위한 금요일(Fridays for Future)’로 대표되는 기후 운동이 결합하며, 유럽의 MZ 저항은 주거·연금·기후라는 ‘삶의 비용’ 전반으로 확장됐다.
아세안과 유럽의 공통분모는 분명하다. 특정 정책 하나가 아니라 집·교육·일자리·노후로 이어지던 삶의 사다리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는 체감이다. 아세안에서는 교육과 민주주의의 흔들림이 “미래 봉쇄”의 분노를 낳았고, 유럽에서는 주거 비용 폭증이 “일해도 삶을 꾸려갈 수없다”는 좌절을 저항으로 바꿨다.
환멸의 경제학이 개인 차원의 적응을 설명했다면, 거리의 정치에서는 그 정서가 집단행동과 제도 불신, 그리고 ‘새 규칙 요구’로 전환되고 있다. 환멸은 더 이상 사적인 감정이 아니라 정치적 자원이다.
이 같은 흐름은 한국에서도 낯설지 않다. 집값 급등과 임금 정체, 자산 격차의 고착화는 ‘월세→전세→매매’로 이어지던 주거 사다리를 끊어 놓았다. 노력과 보상의 연결 고리가 약해질수록 청년층의 경제 행태는 개인적 생존 전략으로 수렴하고, 그 불만은 언제든 정치적 형태를 띨 준비를 한다.
환멸의 경제학은 Z세대를 비난하기 위한 개념이 아니다. “왜 이 세대는 더 이상 게임의 규칙을 믿지 않는가”를 묻는 질문이다. 아세안과 유럽의 거리에서 확인되듯, 그 질문에 대한 사회의 답이 늦어질수록 환멸은 경제를 넘어 정치의 언어가 된다.
필요한 것은 구호가 아니라, 집과 교육, 일자리와 노후라는 최소한의 사다리를 회복할 수 있다는 제도적 신호다. 세계 MZ세대의 저항은 그 신호가 얼마나 시급한지, 그리고 얼마나 세계적인 과제인지를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는 지적이다.
정재철 기자 jcjung@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