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멸의 경제’가 집단분노로 전환

2026-01-16 13:00:06 게재

아세안·유럽 MZ세대가 거리로 나온 이유 … ‘사다리 붕괴’ 좌절이 저항으로

집을 사고, 아이를 낳고, 은퇴를 준비하는 것. 한 세대 전까지는 ‘노력하면 가능하다’고 여겨졌던 삶의 이정표들이 세계 곳곳에서 동시에 멀어지고 있다. 이를 설명하는 신조어 ‘환멸의 경제학(disillusionomics)’이 최근 국제 담론의 전면에 떠올랐다. 경제 시스템이 약속했던 보상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집단적 인식, 그런 인식에 대한 개인과 사회의 반응을 포착한 개념이다.

2025년 12월 10일 불가리아 소피아에서 정부 퇴진을 요구하는 반정부 시위대가 도심을 행진하고 있다. 2026년도 예산안을 둘러싼 갈등과 내각 불신임 표결을 앞둔 정치적 긴장 속에 전국에서 시위가 확산되고 있다. EPA 연합뉴스

이 개념은 더 이상 소비 트렌드의 해설어에 머물지 않는다. 동남아시아(아세안)와 유럽에서 잇따라 터져 나온 MZ세대의 거리시위는 환멸의 경제가 정치적 저항으로 전환되는 경로를 보여준다. 개인의 생존전략으로 시작된 환멸이 제도와 권력을 향한 집단행동으로 확장되는 순간이다.

“나를 위한 시스템 아니다”

환멸의 경제학을 전면에 세운 인물은 영국 출신 Z세대 경제평론가 앨리스 라스먼이다. 라스먼은 지난해 10월 3일 영국 일간 가디언 기고에서 “기성세대에게는 집과 가족, 안정된 노후를 제공했던 경제 시스템이 오늘날 Z세대에게는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고 직격했다. 그는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시스템 속에서 안정감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세대”라는 문장으로 세대감각을 요약했다.

이같은 문제의식은 이달 10일 포춘 인터뷰에서 한층 분명해졌다. 라스먼은 “겉으로 흩어져 보이는 Z세대의 소비·노동·투자행태를 하나로 묶는 접착제가 바로 환멸”이라며 ‘디스일루전노믹스’가 자신이 만든 용어임을 밝혔다.

라스먼의 인식에는 개인적 경험도 겹쳐 있다. 그는 컬럼비아대 수학 이후 미국 국제개발처(USAID) 이코노미스트 구두 제안을 받았다가 철회되는 일을 겪었고, 이를 비즈니스 인사이더 기고로 공개했다. “시스템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는 체감이 세대정서로 확장됐다는 설명이다.

거리로 뛰쳐나온 환멸의 경제

환멸의 경제학은 ‘낭비’가 아니라 ‘적응’을 설명한다. 장기계획이 보상받지 못한다는 전제 아래 Z세대는 삶을 여러 개의 수입원으로 쪼갠다. 하나의 직장·하나의 월급 대신 부업과 플랫폼 노동, 콘텐츠 제작을 병행한다.

소비는 ‘가치’ 중심으로 재편된다. 명품 대신 듀프(저렴한 대체재)를 택하고, 신용카드보다 선구매 후결제(BNPL)을 활용해 현금흐름을 관리한다. 주거는 이 변화의 상징이다. ‘하우스 해킹’(필요 이상의 집을 빌린 뒤 방을 나눠 재임대)은 집을 안정의 상징이 아니라 비용을 상쇄하는 장치다. 라스먼은 “에어비앤비가 ‘남는 방을 돈으로 바꿔라’는 논리를 밀어붙였다면, Z세대는 그 논리를 일상 전체로 끌어올렸다”고 설명했다.

동남아에서 환멸은 빠르게 거리로 나왔다. 인도네시아에서는 2025년 상반기 학생·청년들이 ‘어둠의 인도네시아(#IndonesiaGelap)’를 내걸고 전국 시위에 나섰다. 무상급식 등 대형 복지공약의 재원 마련 과정에서 교육·고등교육 예산이 조정되자 “교육과 일자리 사다리를 희생시킨다”는 반발이 폭발했다. 이 흐름은 파이낸셜 타임스가 2025년 2~3월 연속 보도로 다루며 국제적 주목을 받았다.

표면적 쟁점은 예산이었지만 정서는 더 깊었다. “지금 비용을 아끼면 미래는 더 비싸진다”는 감각, 다시 말해 환멸의 경제가 집단적 분노로 전환된 것이다. 2025년 3월 유럽 매체 모니터 매거진의 현장 르포는 군 관련 법 개정과 민주주의 후퇴 우려가 시위를 증폭시켰다고 전했다.

정재철 기자 jcjung@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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