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비디아 800V 직류체제 선언의 파장
AI 인프라 지각변동 … 전력·냉각·배선까지 바뀌는 AI 데이터센터 산업재편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투자가 3년 만에 5조달러 규모의 ‘블랙홀’로 커졌다. 중국이 AI 경쟁에서 앞서나가지 못하도록 막으려면 앞으로 5년간 최소 5조달러가 필요하다는 얘기가 미국 시장에서 나오면서, AI 거품붕괴 위기까지 거론됐다. 그런데 이 거대한 자금 수요는 더 커질 전망이다.
지난해 10월 미국 캘리포니아주 산호세에서 열린 오픈 컴퓨터 프로젝트(OCP) 글로벌서밋에서 엔비디아는 AI 데이터센터의 전력 ‘길’을 아예 다시 깔겠다고 선언했다. 지금처럼 415V 교류를 여러 단계로 바꿔 쓰는 구조로는 서버 1단위당 전력이 1㎿까지 치솟는 초고밀도 시대를 감당하기 어렵다는 판단에서다. 엔비디아는 2027년부터 800V 직류 전력 체계로 전환해 같은 전력을 더 적은 전류로 보내 배선과 구리 부담, 전력 손실과 발열을 줄이고, 서버 단위당 밀도를 1㎿급으로 끌어올리겠다고 밝혔다.
이 전환의 대표 사례가 바로 이날 제시한 차세대 루빈 플랫폼 기반의 베라 루빈 NVL144 서버와, 576개 GPU를 한덩어리로 묶어 운용하는 ‘카이버’ 시스템이다. GPU를 이 정도로 몰아넣으려면 칩 성능뿐 아니라 전력과 냉각까지 새 표준이 필요하다. 엔비디아가 800V 직류를 내세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발표 이후 전력·냉각·반도체 업체까지 70여개 파트너가 관련 장비와 부품을 내놓으며, 엔비디아가 제시한 800V 직류 기반 서버 구조를 ‘현실의 제품’으로 구현하는 작업이 본격화하고 있다.
엔비디아가 데이터센터 전력 체계를 415~480V 교류에서 800V 직류로 바꾸겠다고 선언한 후 ‘AI 인프라’ 판이 공급망 전반으로 번지고 있다. 승부는 서버 한대 성능이 아니라, 서버 단위의 전력·냉각·배선구조를 통째로 다시 짜는 ‘공장형’ 전환에 있다. 누가 먼저 800V 직류 설계를 대규모로 적용해 안정적으로 굴리느냐가 차세대 데이터센터 경쟁의 핵심이 되고 있다.
관련 업체 동시에 움직이는 산업재편
가장 먼저 반응한 건 전기를 실제로 끌어다 쓰는 데이터센터 사업자들이다. 코어위브 람다 네비우스 오라클클라우드 투게더AI 등은 800V 직류 기반 설계를 검토하거나 구현에 착수한 것으로 전해진다. 고성능 GPU를 서버랙에 고밀도로 채우는 순간 전력 손실과 발열이 함께 치솟는 만큼, 전력 변환 단계를 줄이고 케이블과 구리 모선 부담을 낮추는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판단이 깔려 있다.
제조·구축현장도 움직인다. 폭스콘은 대만 가오슝의 40㎿급 데이터센터에 800V 직류 적용 설계를 추진하는 것으로 거론된다. 개념이 아니라 대형시설에서 직류 전환을 실제로 구현하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인프라 업체들은 이 전환을 ‘현장용 제품’으로 구체화하고 있다. 버티브홀딩스는 전력공급 장치와 냉각설비를 묶은 800V 직류 표준 설계안을 공개하고, 엔비디아와 함께 적용 가능한 수준까지 설계·검증을 진행했다고 밝혔다. 버티브는 800V 직류 전력 제품군을 올해 하반기 출시해 내년 엔비디아 루빈 울트라 플랫폼을 지원하겠다는 계획도 내놨다.
서버·스토리지 강자인 HPE 역시 엔비디아의 차세대 카이버 시스템을 뒷받침하기 위해 서버·스토리지·전력인프라 제품군을 800V 직류 기준에 맞춰 내놓았다. 초고밀도 GPU 서버를 안정적으로 돌리려면 서버뿐 아니라 배전과 운영 관리까지 한 패키지로 맞물려야 한다는 계산으로 읽힌다.
‘전력관리’ 영역에서도 표준 주도권 경쟁이 시작됐다. 텍사스인스트루먼트는 800V 직류 전력 체계를 차세대 표준으로 내세우며, 새너제이에서 열린 오픈 컴퓨트 서밋에서 전력관리 칩과 설계자료를 공개했다. 직류 전환이 설비투자에 그치지 않고 전력 변환·제어기술에서 누가 기준점을 쥐느냐의 싸움으로 번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전력반도체 공급망도 촘촘히 깔린다. 아날로그디바이스 인피니언 온세미 ST마이크로 등은 실리콘카바이드, 질화갈륨 기반 전력반도체로 고효율·고전력 밀도 전환 수요를 노린다. 전압이 올라갈수록 손실을 줄이고 발열을 잡는 기술이 핵심이 되면서 와이드밴드갭 반도체가 데이터센터 투자 확대의 ‘숨은 병목’으로 떠오르고 있다.
배전과 보호, 안전규격을 맡는 전력 장비사들도 빠질 수 없다. ABB 이튼 GE버노바 히타치에너지 미쓰비시 슈나이더 지멘스 등이 800V 직류 전력 시스템을 준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직류 전환은 전압만 바꾸는 일이 아니라 차단기, 전력보호장치, 안전기준과 유지보수 체계까지 다시 설계해야 하는 작업이다. 대형 전력 장비사들의 참여속도가 800V 직류 확산의 속도를 가를 가능성이 크다.
결국 800V 직류 전환은 엔비디아의 하드웨어 로드맵을 넘어 데이터센터 운영사, 인프라 업체, 전력 반도체·전력 장비사가 동시에 움직이는 산업재편으로 번지고 있다.
과도기적 해법 통해 직류체제 연착륙 시도
가장 먼저 등장하는 과도기 해법이 ‘사이드카 랙’이다. 2025~2027년 초기 단계에서는 기존 교류 전원을 현장에서 800V 직류로 바꿔 주고, 순간 전력 수요를 버퍼링하는 단기 저장 기능까지 붙인 모듈이 핵심 역할을 맡는다. 기존 설비를 한번에 갈아엎지 않고도 직류체제로 옮겨갈 수 있도록 해주는 ‘중간단계’인 셈이다.
같은 전력을 보낼 때 직류 800V로 올리면 전류가 줄어 배선이 가벼워지고, 구리 사용을 최대 45%까지 낮출 수 있다. 냉각 측면은 서버 단위 전력밀도가 1㎿급으로 올라가면 공기로 열을 빼는 방식만으로는 감당이 어렵다. 결국 액체 냉각이 필수가 된다.
안전장치도 바뀐다. 직류는 전류가 끊기기 까다로운 특성이 있어, 기존 교류 차단기만으로는 고전압 환경을 안정적으로 제어하기 어렵다. ABB는 국제전기기술위원회 인증을 받은 직류 차단기를 내놓으며 시장 선점에 나섰다. 또한 초고밀도 연산은 전력 수요가 순간적으로 출렁이기 쉬워, 서버 가까이에서 변동을 흡수하는 대규모 배터리 에너지 저장 장치와 초고속 축전기가 필요하다.
인프라·안전·반도체업체 등이 수혜주
투자 관점에서 보면 수혜 축은 네 갈래로 정리된다. 첫째는 전력·냉각을 ‘패키지’로 공급하는 인프라 업체다. 버티브는 엔비디아와 협력해 800V 직류 설계를 상용화 단계까지 끌어올렸고, 2026년 하반기 800V 직류 전력 제품군 출시, 2027년 루빈 울트라 지원 일정을 제시했다. 슈나이더일렉트릭도 1㎿급 서버를 기준으로 기존 교류를 800V 직류로 바꿔 서버에 공급하는 ‘사이드카’ 방식으로 초기 시장을 공략하겠다는 입장을 내놨다.
둘째는 직류 시대의 ‘안전장치’를 쥐는 업체다. 800V 직류 확산의 병목은 차단·보호 기술인데 ABB는 솔리드스테이트 직류 차단기 등이 국제전기기술위원회 인증을 받았다고 공개하며 시장 선점에 나섰다.
셋째는 전력관리·전력반도체다. 텍사스인스트루먼트는 오픈 컴퓨트 서밋에서 800V 직류까지 확장 가능한 전력 관리 체계와 설계 자료를 공개하며 ‘표준경쟁’에 뛰어들었다. 여기에 실리콘카바이드·질화갈륨 기반 전력반도체를 공급하는 아날로그디바이스 인피니언 온세미 ST마이크로일렉스로닉스 등이 직접 수혜 후보로 묶인다.
넷째는 대형 설비투자를 실제로 집행하는 구축 쪽 신호다. 폭스콘의 대만 AI 데이터센터 추진 등은 전력 전환이 ‘개념’이 아니라 설비투자로 넘어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결국 이번 계기로 1차 수혜 종목를 꼽는다면 엔비디아와 800V 직류 로드맵을 공식화한 버티브, 직류 차단기 인증 제품을 앞세운 ABB, 800V 직류 전력 관리 기준점을 선점하려는 텍사스인스트루먼트, 과도기 해법인 사이드카를 제시한 슈나이더일렉트릭이 가장 깔끔한 ‘근거형’ 후보군이다.
2년 후 신규 데이터센터 80~90%가 채택
골드만삭스는 최근 보고서에서 “800V 직류 체계는 AI 데이터센터의 구조적 변화를 의미하며, 장기적으로 총소유비용을 30% 절감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다만 단기적으로는 막대한 투자부담이 불가피하다고 지적했다.
프랑스 전력 기업 레그랑은 “고전압 전환으로 ㎿당 매출 잠재력이 기존 200만유로에서 300만유로로 늘어날 수 있다”고 전망했다. 반면 전문가들은 2028년 이후 신규 데이터센터의 80~90%가 800V 직류를 채택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이주영 기자 123@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