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시평
화폐발행액 급증이 가리키는 것들
21세기 들어 우리의 경제활동에 큰 변화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 각종 거래시 카드와 여러 페이 등이 주로 사용되면서 현금결제가 크게 줄어든 현금없는 사회로의 급속한 이행이 아닐까 한다. 스웨덴은 아예 2030년까지 현금없는 사회로 이행한다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이런 추세로만 보면 경제주체가 현금보유를 별로 늘리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되지만 정작 통계는 전혀 그렇지 않다. 지난해 말 화폐발행 잔액은 210조7000억원으로 최근 20년 동안 무려 185조원이나 증가했다. 민간의 현금보유액은 한국은행 창구에서 나간 현금(화폐발행액) 중에서 은행이 보유한 시재금을 차감해 산출한다. 그런데 은행의 시재금은 거의 변화가 없으므로 민간의 현금통화 수요 변화는 곧 화폐발행액 증감으로 나타난다. 이처럼 현금없는 사회로의 이행에도 화폐발행액은 오히려 급증해 왔는데 그 이유는 뭘까?
현금없는 사회로 이행하고 있는 데도 화폐발행액 급증
2000년 이후 화폐발행액이 급증한 때가 대략 4번 있었다. 첫번째가 10만원권 수표 발행에 따른 비효율을 줄이기 위해 5만원권 지폐가 발행된 2009년이다. 이때 경제주체들은 10만원권 수표를 5만원권 지폐로 대체하면서 화폐발행 잔액이 6조5000억원 증가했는데 이는 이전 4년 평균(1조5000억원)을 거의 4배 이상 웃돌았다.
두번째는 박근혜정부가 출범한 2013년과 2014년이다. 이때는 금융소득종합과세 부과기준을 4000만원에서 2000만원으로 낮춘 데다, 증세없는 복지 확대, 지하경제 양성화 등을 내세우며 세무조사가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자 세원 노출을 꺼리는 사람들의 가치저장적 현금수요가 확대되면서 화폐발행액이 2013년에는 9조원, 2014년에는 11조6000억원이나 급증해 이전 4년 평균(5조9000억원)을 거의 2배 이상 웃돌았다. 당시 신문을 보면 현금이나 금 등을 보관하기 위한 개인금고 구입 열풍이 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세번째는 코로나팬데믹 시기인 2020~2021년이다. 이때는 한은이 기준금리를 0.5%까지 내리면서 현금보유에 따른 기회비용이 크게 줄었다. 게다가 전염병 확산으로 경제주체들의 사회적 불안감이 최고조에 달하면서 예비적 동기의 화폐수요도 크게 늘어났다. 화폐발행액은 2020년에는 21조8000억원, 2021년에는 20조1000억원 급증해 이전 4년 평균(9조7000억원)을 2배 이상 웃돌았다.
네번째가 정치경제적 불확실성이 최고조에 달했던 2025년이다. 작년에는 미국의 관세부과와 같은 경제적 불확실성이 높아졌고 계엄과 대통령 탄핵과 관련한 정치적 불확실성까지 겹치면서 가치저장적 현금수요가 크게 늘어남에 따라 화폐발행액이 17조6000억원이나 급증했다.
화폐발행액 증가는 통화정책 운용과 금융시스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우선 화폐발행액이 늘면 지준예치금이 감소함에 따라 은행이 한국은행에 유지해야 하는 법정지급준비금을 맞추지 못하게 된다. 은행들이 이를 맞추기 위해서는 기업대출 등을 대규모로 회수해야 하는데, 일시에 그렇게 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래서 한은은 공개시장운영을 통해 지급준비금이 일시 부족한 은행에게 유동성을 공급하게 된다. 지난해 한국은행이 환매조건부채권(RP)매입과 단순매입으로 은행에 유동성을 공급한 것은 바로 화폐발행액 증가에 따른 은행의 지급준비금 부족과 직접 관련이 있다.
경제주체들의 불확실성이나 불안감 나타내는 지표
위 사례에서 보듯 화폐발행은 단순한 거래수단을 넘어 현재 경제주체들이 느끼고 있는 정치·사회·경제의 불확실성이나 불안감을 나타내주는 지표 기능을 한다. 따라서 경제당국자들은 화폐발행액 추이를 통해 국민들이 느끼는 정치경제 상황 등에 대한 정서를 확인하고 경제정책 운용의 투명성과 예측가능성을 높이도록 해야 한다. 이제 다양한 측면에서 화폐발행액 추이를 바라볼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