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한국 에너지저장장치 산업의 위기와 재도약

2026-01-22 13:00:00 게재

에너지 대전환의 시대, 재생에너지는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됐다. 하지만 태양광과 풍력이 내뿜는 불규칙한 전력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에너지저장장치(ESS)가 없다면 탄소중립은 사상누각에 불과하다. 한때 세계 시장을 호령하던 한국의 ESS 산업은 현재 안팎의 거센 도전에 직면해 있다.

오늘 한국의 ESS 산업은 극심한 국내 시장 정체와 글로벌 경쟁 심화라는 이중고를 겪고 있다. 2010년대 후반 정부 보조금 정책에 힘입어 급성장했던 국내 시장은 연이은 화재사고와 신재생에너지공급인증서(REC) 가중치 일몰 등으로 인해 투자가 급격히 위축됐다.

반면 글로벌 시장은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매년 기록적인 성장세를 보이고 있으며, 특히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의 폭발적인 증가로 인해 전력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ESS 수요는 그 어느 때보다 높다.

가장 뼈아픈 지점은 안전성에 대한 신뢰저하다. 리튬이온 배터리 기반 ESS의 화재 문제는 산업 전체에 트라우마를 남겼다. 이는 규제 강화로 이어져 설치비용 상승을 초래했고 국내 기업들의 경쟁력을 약화시켰다.

또한 한국 기업들이 주력해온 리튬 NCM배터리는 에너지 밀도는 높지만 ESS에서 가장 중시되는 경제성과 안전성 측면에서 중국의 리튬인산철(LFP)배터리에 밀리고 있다. 중국 기업들이 저렴한 가격을 무기로 글로벌 ESS 공급망을 장악하는 동안 우리 기업들은 대응 시기를 놓치며 시장 점유율이 10% 이하까지 추락하는 위기를 맞았다. 이미 ESS 시장의 표준전지는 LFP배터리로 통일되고 있는 실정이다.

재도약 위해서는 근본적 체질개선 필요

향후 ESS 시장의 핵심 키워드는 장주기와 AI 인프라다. 재생에너지 비중이 높아질수록 8시간 이상의 장시간 전력을 공급할 수 있는 장주기 ESS의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 또한 전력 거래 플랫폼과 연계된 에너지 관리 시스템 및 가상발전소 형태의 통합 솔루션 시장이 열리고 있다. 2026년 현재 미국 시장에서 전개되는 K-배터리의 대규모 LFP 수주는 이러한 흐름에 우리가 뒤늦게나마 올라탔음을 시사한다.

한국 ESS 산업이 다시 도약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인 체질 개선이 필요하다. 첫째, 기술 다각화와 안전성 혁신이다. LFP배터리의 조기 양산뿐만 아니라, 화재 위험이 낮은 나트륨이온배터리나 흐름전지 등 차세대 ESS 기술에 대한 과감한 R&D 투자가 이루어져야 한다. 아울러 NFPA 855와 같은 글로벌 수준의 안전기준을 선제적으로 도입해 무너진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

둘째, 시장친화적인 제도적 뒷받침이다. 최근 도입된 ESS 중앙계약시장을 더욱 활성화해 사업자의 수익모델을 다변화해야 한다. 단순 보조금이 아니라 전력 계통 기여도에 따른 합리적인 보상체계를 구축하여 민간 투자를 유도해야 한다.

셋째, 분산에너지 특구 및 AI 데이터센터와의 연계다. 지역 단위에서 에너지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분산에너지 체계 내에서 ESS가 핵심 인프라로 작동할 수 있도록 규제를 과감히 혁파해야 한다.

목표 달성하려면 정부 기업 원팀돼야

ESS는 단순한 배터리 사업이 아니다. 국가 전력망의 안전판이자 에너지 안보를 지키는 보루다. 제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이 제시한 2038년까지의 ESS 확충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정부와 기업이 원팀이 돼 움직여야 한다. 안전이라는 기본 위에 기술이라는 혁신을 더할 때 한국 ESS 산업은 에너지 대전환 시대의 진정한 주인공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하영균 에너지11 기술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