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산책

AI 시대의 공부, ‘벽돌쌓기’ 아닌 ‘실뜨기’다

2026-03-17 13:00:02 게재

인간이 지식을 습득하고 확장하는 정교한 메커니즘은 의외로 아이들의 놀이에서 발견된다. 털실 한줄을 가져와 양 끝을 묶고 팽팽하게 당겨보자. 양손에 실을 한번씩 더 감아 고리를 만든다. 가운뎃손가락을 반대편 실을 차례로 떠내면 ‘출렁다리’ 모양이 만들어진다. 실뜨기(string figures) 놀이의 시작이다. 이 놀이는 실 한줄로 여러가지 모양을 만들어내는 것이 묘미다. 그런데 출렁다리 다음에 또 다른 모양을 만들기가 무척 어렵다.

이 실뜨기 놀이의 전략은 맞은편에 친구를 불러 앉히는 것이다. “자, 받아봐!” 손을 내밀면 친구가 실의 어느 지점을 낚아채느냐에 따라 사다리가 되고 다이아몬드가 된다. 실은 내 손을 떠나 친구의 손으로 옮겨가며 쉴 새 없이 변모한다.

이 역동적인 주고받기 놀이로 과학기술학자 도나 해러웨이는 ‘함께 생각하기(thinking-with)’를 설명한다. 지식은 개인의 머릿속에 고립되지 않으면서 서로 주고받으며 엮이고 비틀어지며 비로소 진화한다. 이 과정은 또한 동시대 연구자들 사이에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다. 세대를 넘나들기도 한다.

혼자 조용히 밑줄 긋고 허공을 보며 암기할 때 지식이 쌓인다고들 흔히 믿는다. 하지만 우리가 ‘공부’라 부르는 일의 본질은 바로 여기 있다. 우리가 ‘공부’라고 믿는 야간 자습의 암기보다 친구에게 설명하다 “어라? 이 부분은 모르겠네!”라고 깨닫는 순간, 배움이 극대화되는 이유가 여기 있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배우는 것보다 다른 사람과 함께 배울 때 배움의 효과는 더 강력하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평형화’ 과정 통해 지식이 나의 것 돼

이 변화는 단순한 느낌이 아니라 물리적인 뇌의 반응이다. 설명하는 자와 듣는 자의 뇌가 하나처럼 움직이는 ‘뇌 동기화’ 현상이다. 거울뉴런이 상대의 의도를 시뮬레이션하고 기존의 지식 틀(스키마)에 새 정보를 끼워 넣는 ‘동화’가 일어난다. 친구가 만든 실뜨기 모양을 내 손가락으로, 안정적으로 옮겨 받는 순간처럼.

진짜 배움은 내 지식의 틀로 설명되지 않는 패턴을 만날 때 시작된다. 친구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실을 낚아챌 때 “어? 이게 왜 안 맞지? 아, 내가 잘못 생각했나?” 라고 느끼는 당황스러운 ‘인지적 불일치’의 순간이다. 순간이 바로 나의 낡은 틀을 부수고 재구성하며 더 넓은 지식의 세계로 나아가는 단계다.

낡은 틀을 부수고 재구성하는 이 과정은 ‘조절’이라고 한다. 동화와 조절이 반복되며 불균형과 재균형을 오가는 이 역동적 지식의 업데이트 과정을 발달 심리학자 피아제는 ‘평형화’라고 설명했다. 실뜨기 패턴이 복잡해지다 단순해지기도 하듯, 정보가 쌓이며 지식이 더 복잡해지다가도 어느 순간 핵심 원리가 드러나면서 구조가 오히려 더 단순하고 명료하게 정리된다. 이런 추상화 지점에서 지식은 비로소 나의 것이 된다.

하지만 길 가던 낯선 이와 대뜸 실뜨기할 순 없다. 실뜨기든 공부든 뇌의 주파수를 서로 맞추려면 적어도 다음의 조건이 필요하다. 서로 같은 곳을 바라보고 집중하는 ‘공동의 주의력’, 실뜨기 규칙을 이미 알고 있어 긴 설명이 필요 없는 ‘공유된 멘탈 모델(shared mental model)’, 상대의 다음 손짓을 읽어내는 ‘상호 예측성’이다. 이 3박자가 서로 맞물릴 때 지식은 광케이블을 탄 데이터처럼 너에게서 나에게로 흐른다.

이 놀이의 파트너는 타인만이 아니다. 혼자 공부할 때 우리는 ‘과거의 나’와 실뜨기를 한다. 새로운 정보를 만날 때 이렇게 중얼거린다. ‘이거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예전에 읽은 문장, 스친 경험, 언뜻 기억나는 장면을 장기기억에서 ‘인출’해오는 행위는 과거의 내가 던진 실을 현재의 내가 받아 쥐는 일이다. 과거에서 보내진 패턴은 현재 나의 작업 기억(working memory) 위로 올라와, 새로운 경험과 섞여 더 정교한 지식의 형태로 만들어진다. 이렇게 업데이트된 스키마는 다시 미래의 나에게 건네질 다음 실뜨기 패턴이 된다.

진짜 공부는 풍요로운 연결에서 나온다

결국 배움은 고립된 벽돌쌓기가 아니다. 타인과 그리고 어제의 나와 시공간을 넘나들며 나누는 역동적인 실뜨기다. 여럿이서 정교한 연결망을 짜는 과정이다. 지금 내 손에 쥔 패턴은 언젠가 누군가가, 혹은 과거의 내가 건네준 패턴 위에 얹힌 결과다. 처음 보는 복잡한 패턴이 나타나도 겁먹을 필요 없다. 잠깐의 꼬임과 불균형을 버티고 나면 그 안에서 더 단순하고 단단한 틀 하나가 남는다.

인공지능(AI)이 모든 정답을 대신 찾아주는 시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보의 양이 아니다. 누구와 그리고 어떤 나 자신과 실을 주고받으며 새로운 패턴을 만들어낼 것인가. 실뜨기를 위한 더 풍요로운 연결이야말로 AI 시대를 살아낼 진짜 공부의 힘이다.

박영민 카이스트 부설 한국과학영재학교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