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한국 외교의 새 좌표는 ‘무력분쟁 불개입’
우리 사회의 화두인 생명과 안전은 인간실존을 지탱하는 핵심가치다. 이는 국가 공동체에도 적용되는 명제다. 생존은 남에게 양도할 수 없는 존재론적 무게를 지니기 때문이다. 지구촌은 베네수엘라 사태를 비롯해 상처투성이 무법사회로 전락하고 있다. 강철주먹을 과시하려고 부드러운 척 연기하던 벨벳 장갑을 벗어 던진 것이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쓴 역사가 투키디데스는 ‘멜로스 회담’ 편에서 기술했다. “강자는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약자는 겪어야 할 것을 겪는다.” 이 싸늘한 명제는 더 차가워졌다. 국제법과 유엔헌장의 질서규범이 우리를 지켜주리라는 기대는 공허해졌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염원하지만 ‘만인의 만인에 대한 싸움’ 상태는 당분간 지속될 것 같다.
외풍을 막아보고자 우리 헌법에 ‘대한민국은 영세중립국이다’라고 명시하자는 시민들의 외침이 들린다. 코스타리카 경우를 보자. 1949년 헌법을 통해 군대를 폐지하고 1983년 영구적·적극적·비무장 중립을 선언했으며 2014년 인권으로서의 평화와 중립국가를 법제화했다. 레이건행정부 등 미국의 재무장 압박이 있었으나 뿌리쳐왔다. 1987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오스카 아리아스 대통령의 미국 의회연설이 대표적이다. 이 소국은 스스로의 결단으로 평화를 지켜나가고 있다.
하지만 직시해야 한다. 한반도의 안보환경은 코스타리카나 스위스 등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걸. 우리는 동맹과 외국군 주둔이라는 현실도 안고 있다.
최고의 동맹은 스스로를 강하게 만드는 것
그렇다면 ‘무력분쟁 불개입 독트린’은 어떨까. 중립과 불개입은 엄연히 다르다. 중립은 저울과 같다. 양쪽의 무게를 느끼며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않으려 한다. 불개입은 거울이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비추지만 거울 속 세상이 불탄다고 해서 거울 자체가 뜨거워지지는 않는다. 중립이 “어느 편도 들지 않겠다”는 고독의 언어라면 불개입은 “우리는 끼어들지 않을 테니, 우리에게 전화하지 말라”는 단절의 언어다.
그리스 신화 속 불화의 여신 에리스(Eris)의 일화를 보라. 신들의 잔치에 초대받지 못한 그녀는 ‘가장 아름다운 여신에게’라고 적힌 황금사과 하나를 슬며시 던져 놓는다. 헤라와 아테나, 아프로디테가 이를 차지하려 다투다 결국 트로이 전쟁이라는 신화적 비극이 터졌다. 정작 싸움의 원인을 제공한 에리스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그저 사과 하나를 던졌을 뿐, 싸운 건 너희들이었잖아?”
우리는 남을 위한 보안관이나 구원자가 아니다. 인도적 지원, 재난구호 재건은 인류애 차원에서 마땅히 해야 한다. 다만 우리 생존과 무관한 무력분쟁에 휘말려서는 안된다. 특히 우크라이나, 대만 유사시 등 휘발성 강한 ‘그들의 분쟁’이 동맹과 전략적 유연성이라는 미명하에 ‘우리의 분쟁’으로 바뀔 가능성을 차단해야 한다.
주권자의 의사에 반하며 우리가 당사자가 아닌 분쟁에 단호히 선을 긋는 것은 공동체의 운명과 미래를 스스로 선택하는 ‘자기결정권(self-determination)’이다. 주체외교다. 주인의식의 당연한 표출이다. 동맹이든 전략적 협력동반자든 관계설정은 중요하나 맹신은 금물이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으로 표현하자면 ‘남의 갑옷은 내 몸에서 흘러내리거나 나를 짓누르거나 나를 옭아맨다.’
결국 최고의 동맹은 스스로를 강하게 만드는 자기와의 동맹이다. 마냥 국방비를 올린다고 안보 딜레마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주변국가들도 군비를 늘리면 우리의 상대적인 좌표와 불안감은 불변일 수 있다. 해법은 모두와 친하게 지내는 것. 협력이 평화이고 친선이 국방이다. ‘서로 싸울 필요가 없게, 남의 싸움에 휘말리지 않게’ 만드는 것이다.
‘자기결정권’이 야만의 시대 건너는 다리다
이편저편으로 나누고 우리는 누구 편이어야 한다는 식의 이분법 프레임은 그래서 가소롭다. 현실 탓 상황 탓 하지 마라. 우리 스스로가 연금술사다. 누군가의 선의에만 의존하는 ‘우아한 속박’보다는 스스로를 단련해가는 ‘고달픈 자주’가 더 강하다.
생명과 안전을 남이 대신해 줄 수는 없다. 타인은 눈물만 흘려줄 뿐이다. 역사 속에서 폴란드는 3회 분할되었지만 자기 몫을 거절한 강대국은 없었다. 악어의 눈물로 연민하는 척 연기했을 뿐이다. 합종연횡의 인류사는 협력의 역사인 동시에 배신의 역사였다. 카프카는 말한다. “인생은 가면무도회였는데 민낯으로 참석한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우리는 맨얼굴로 무도회의 가면들을 꿰뚫어 보아야 한다. 비행기가 이륙하기 위해 익숙한 땅과 작별하듯 낡은 활주로와 결별하고 높이 떠오르자. 우리의 운명을 타인의 답안지에 적어 내지 않겠다는 자기결정권, 그것이 야만의 강을 건너는 다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