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원·하청 노사관계
시행 앞둔 노란봉투법, 독일은 이미 제도로 정착
원청 책임, 산별교섭·사업장평의회·파업권으로 관리 … 예측 가능성, 경쟁력을 높이는 조정장치로 작동
3월 10일 시행 예정인 이른바 노란봉투법(개정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을 둘러싸고 기업 경쟁력 약화 우려와 노동권 보호 필요성이 맞서고 있다.
독일 도이체포스트·DHL을 비롯해 지멘스 폭스바겐 도이체반 등 독일 주요 대기업과 공기업이 근로계약의 형식이 아닌 노동조건에 대한 실질적 지배력을 기준으로 사용자 책임을 인정해 온 독일의 노사관계 제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독일 사례를 통해 간접고용이 일상화된 산업구조 속에서 노란봉투법이 갈등을 확대하는 제도인지, 아니면 책임의 공백을 메워 예측 가능성과 경쟁력을 높이는 조정 장치인지를 살펴본다.
3월 시행을 앞둔 개정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 이른바 ‘노란봉투법’을 둘러싸고 기업의 우려와 노동계의 기대가 교차하고 있다. 노란봉투법의 핵심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근로계약 형식과 무관하게 하청노동자의 노동조건에 실질적 지배력을 행사하는 원청을 사용자로 인정해 교섭 책임을 부과하는 사용자 개념의 확대다. 둘째, 파업 등 쟁의행위와 관련해 노동자와 노조에 과도하게 청구돼 온 손해배상·가압류 관행을 제한하는 내용이다. 셋째, 경영상 결정으로 노동조건에 중대한 변화가 발생하는 경우까지 노동쟁의 범위에 포함하도록 한 점이다.
이는 한국만의 급진적 실험은 아니다. 독일에서는 사업장평의회법, 산업별 교섭, 파업에 대한 법적 보호가 결합돼 이미 오랜 기간 제도적으로 작동해왔다. 실질적 지배력을 가진 원청이 책임을 인정하고 노동보호와 생산성 향상을 위한 교섭에 나설 때 갈등은 소송이 아니라 대화와 조정을 통해 해결된다. 독일 사례에 비춰보면 노란봉투법은 손해배상 중심의 갈등 관리 방식을 교섭과 조정 중심으로 전환해 기업의 예측 가능성과 중장기 경쟁력을 높이려는 제도로 해석할 수 있다.
◆사용자성, ‘법적 계약’ 아닌 ‘실질적 지배력’ 기준 = 대표적 사례로는 도이체포스트·DHL이 꼽힌다. 독일 우편·통신 공기업이었던 도이체분데스포스트는 1995년 민영화 이후, 2002년 미국 물류기업 DHL을 인수하며 세계적 특송·물류 기업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민영화 이후 고용구조는 안정적 정규직 중심에서 점차 자회사·하청·외주 중심의 다층구조로 전환됐다. 특히 소포 및 배송 부문에서 비용 경쟁이 심화되며 업무가 지역 자회사나 외부 업체로 이전됐다.
법적으로는 사용자 책임이 분산됐지만 실제 운영에서는 본사가 배송 노선과 작업시간, 성과 기준, 차량과 유니폼 규격, 정보통신(IT) 시스템까지 통합 관리했다. 2015년 설립된 배송 자회사에서는 신규 채용 노동자들이 본사 단체협약보다 낮은 임금과 근로조건을 적용받았다.
노조와 사업장평의회는 이를 단체협약 회피를 위한 사용자 책임 분리라고 비판했다. 별도의 자회사라 하더라도 업무 전반을 통제하는 주체는 본사인 만큼 사용자성은 ‘법적 계약’이 아니라 ‘실질적 지배력’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 갈등은 2015년 전국적 파업으로 이어졌다. 6월부터 7월까지 약 4주간 진행된 파업에는 최대 3만명이 참여했다. 쟁점은 임금과 근로조건뿐 아니라 자회사 확장 전략 전반이었다. 이 과정에서 본사가 자회사·하청·외주에 실질적 지배력을 행사하면서 사용자 책임을 회피하는 문제가 사회적 논쟁으로 부각됐다.
파업이후 자회사·외주 중심 구조와 임금 격차는 점진적으로 개선됐다. 2015년 약 7600명의 자회사 직원이 본사로 전환됐고 2019년에는 약 1만3000명의 배송 노동자가 본사 임금체계로 편입되는 노사 합의가 이뤄졌다.
◆산별교섭·사업장평의회가 만든 조정 경로 = 독일의 산별 단체협약은 산업 전체 노동자의 임금과 근로조건 하한선을 설정해 기업 간 임금 덤핑 경쟁을 차단한다. 통합서비스노조는 도이체포스트·DHL의 외주화 전략이 산업 전체 임금 기준을 붕괴시킨다고 판단해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자회사와 외주까지 산업 차원에서 관철했다. 자회사·하청·외주를 통한 사용자 책임 회피는 자회사·외주까지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요구하는 산별교섭으로 무너졌다.
사업장평의회법은 이를 법적으로 뒷받침한다. 인사계획과 채용·전환·감축은 사전에 평의회에 설명해야 하며, 전보·배치전환, 직무 변경, 승진·강등 등 주요 인사조치에는 종업원평의회의 사전 동의가 필요하다. 대규모 구조조정이나 사업 이전·축소, 집단해고 등 경영상 결정도 평의회의 참여와 공동결정 대상이다. 경영권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갈등을 제도 안에서 조정하는 장치다. 노란봉투법이 문제 삼는 ‘경영상 결정으로 인한 노동조건의 중대한 변화’에 대해 독일은 이미 사업장평의회법으로 제도적 대응 경로를 갖추고 있다.
◆파업권은 노동시장 균형 장치 = 독일에서 파업은 예외적 혼란이 아니라 헌법적으로 보호된 권리다. 바이마르 헌법(1919년)은 단결권과 단체교섭권을 헌법적 권리로 명시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은 사회적 시장경제 체제 속에서 파업권을 노동시장 경쟁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필수 제도로 이해해왔다.
노동자는 노동력을 저장할 수 없고 생계가 노동에 의존하는 반면, 기업은 자본을 축적하고 교섭을 장기화할 수 있는 구조적 우위를 가진다. 파업권은 이러한 교섭력 불균형을 조정하는 장치다. 파업권이 작동하지 않을 경우 노동시장은 사용자 독점 상태로 기울 수밖에 없다.
독일 연방헌법재판소는 1995년 판결에서 기본법 제9조 3항을 근거로 파업권과 단체교섭 자율의 헌법적 지위를 명확히 했다. 재판소는 파업을 예측 가능한 경쟁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행위로 봤으며 그로 인한 손실은 기업이 감수해야 할 경영상 리스크로 판단했다.
◆책임 있는 원청이 불확실성을 줄인다 = 도이체포스트·DHL뿐 아니라 지멘스, 폭스바겐, 도이체반(독일철도공사) 등 독일의 대기업과 공기업들은 근로계약 형식이 아니라 노동조건에 대한 실질적 지배력을 기준으로 사용자 책임을 인정해왔다. 자회사와 외주가 활용되더라도 임금·고용·인사·구조조정을 통제하는 주체가 교섭과 공동결정의 책임을 진다.
독일은 자회사·하청 등 외주화를 금지하지 않지만 책임 없는 외주화는 허용하지 않는다. 단기 비용 절감을 위한 책임을 분산시키는 외주화 전략은 초기에는 재무지표를 개선할 수 있으나 임금 격차와 고용 불안정이 누적될수록 파업과 소송, 공정 차질 등 예측 불가능한 비용을 키운다.
산별교섭과 사업장평의회법을 통해 독일은 임금과 노동조건의 하한을 설정하고 실질적 지배력을 가진 원청이 교섭과 조정의 책임을 지도록 함으로써 이러한 불확실성을 제도 안에서 관리해왔다. 동일노동 동일임금과 고용안정은 숙련 축적과 이직률 감소로 이어졌고 원하청 노사 간 신뢰와 협력을 강화했고 이는 공정 개선과 품질 향상, 중장기적 생산성 제고로 연결됐다.
노란봉투법이 다루는 사용자 책임과 쟁의권 보장은 독일 대기업과 공기업에서 이미 경영 안정과 경쟁력을 떠받쳐 온 제도적 기반이다. 노란봉투법이 ‘노동자 보호를 위한 특혜’라기보다 간접고용이 일상화된 산업구조에서 책임의 공백을 메우기 위한 한국식 조정장치에 가깝다.
독일의 경험은 원청의 사용자 책임과 파업권의 제도화가 기업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규제가 아니라 오히려 이를 안정적으로 떠받치는 기반임을 보여준다.
정미경
독일정치경제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