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 속 시대정신을 담은 진한 묵향
문인화, 여백을 쓰다/서규리·신용산 지음/도서출판 깊은샘/2만7000원
동양화의 미덕은 여백이다. 공간은 비어 있지만 의미가 채워져 있다. ‘침묵’의 목소리다. 생각과 의미를 담은 붓이 지나간 자리엔 때로는 훈장이, 때로는 장부가 앉아있다.
‘문인화, 여백을 쓰다’는 붓으로 시대를 그려간 선비들의 문인화를 실제 그림과 수필로 따라가며 설명하고 있다.
저자인 서규리·신용산씨는 ‘문인화’만의 인문정신에 주목하면서 생략과 여백을 통한 새로운 회화의 추구가 문인화의 현대적 수용까지 가능케 했다고 봤다.
이들은 “문인화는 일반적인 화가가 아닌, 당대의 지식인이자 사상가인 문인들이 자신들의 이상과 내면세계를 대상에 빗대어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독특한 예술 장르”라며 “그래서 서양미술이 다루는 사물·인물·사건의 형상화를 추구하는 구상의 세계나 현실 너머의 추상 세계를 다루는 비구상의 세계와는 전혀 다른 차원으로 문인화의 특장점을 소개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책은 중국과 고려, 조선, 현대에 이르기까지 문인들의 내면 풍경을 60여 편의 걸작 문인화로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서 내면과 정신세계를 시·서·화로 구현해 낸 문인화만의 독특한 회화실험이 시대를 흘러가며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펼쳐냈다.
‘시’는 자연과 삶을 관조하고 세계를 해석하는 정신의 언어다. ‘서’는 붓의 움직임에 깃든 인격이며 학문이다. ‘화’는 현실의 재현보다 정신의 표현에 가깝다. 그래서 문인화는 기술보다 인격을, 묘사보다 기운에 초점을 맞춘다. 거칠고 소박하거나 여백이 너무 많아 완결되지 않은 듯 보이지만 그 불완전함 속에 자유와 사유, 자연에 대한 존중이 스며들어 있다.
중국의 위진남북조 시대에 정신을 그리는 예술로 격상된 산수화는 당나라시대로 접어들면서 사상과 감정, 시와 철학이 교차하는 통로가 됐다. 송나라 땐 소식이 ‘사인화’란 표현으로 ‘문인화’란 용어의 탄생을 알렸고 정신을 그리는 문인화 이론의 토대를 마련했다. 옛사람의 뜻을 중시하는 문인화 양식을 확립한 원나라 때와 산수화의 정통성을 확립하려고 그림의 품격을 중시한 명나라 때, 정통과 창조, 사상과 감정이 충돌하고 교차하면서 근대를 맞았던 청나라 때의 문인화도 중요한 역사의 획을 그었다.
문인화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고려 중엽이다. 조선후기 김정희는 문인화의 절정을 보여줬다. 일제강점기에도 전통을 이어간 도제식 교육은 현대 문인화의 초석이 됐다.
한국 현대문인화의 흐름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근대 이전의 문인화가 일정한 미학과 정신, 양식적 정수를 공유하며 전개되었다면 현대에 이르러서는 그 정수가 흩어지고 해체되었다. 오히려 다채로운 해석과 실험의 장으로 나아가고 있다. 서구 현대미술의 언어를 적극적으로 차용하고 매체의 다양화를 수용하면서 문인화의 전통적 규범과 형식을 과감히 해체했다. 여전히 ‘문인의 정신’이라는 내면성에 주목하고 있지만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은 대담하게 달라졌다는 얘기다.
저자인 서규리 씨는 미술을 전공하고 불교문예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예술의 전당 후원회원, 우송헌 먹그림회원, 한국미협 초대작가(문인화)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장욱진s-그림으로 보는 선의 미학’이 있다.
신용산 씨는 국문학을 전공하고 ‘법화경 서사의 상징을 통해 본 사회적 실천성 연구’로 불교문예학 박사를 받았다. ‘대륙의 신라왕자’(지장보살 김교각 스님 일대기), ‘나는 세상과 다투지 않는다’(금강경 해설서)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