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영 칼럼
누가 ‘우리’인가
1989년은 미국인들이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은 해였다. 헐리웃의 간판 영화회사 컬럼비아픽처스가 일본 전자회사 소니에 팔리더니, 뉴욕 맨해튼의 ‘심장’으로 불리던 록펠러센터마저 일본 부동산회사 미쓰비시지쇼의 손으로 넘어갔다. 미국의 번영을 상징해온 두 회사가 잇달아 일본 기업에 넘어가자 현지 언론은 “미국의 영혼이 팔려나갔다”는 탄식을 쏟아냈다.
미국 내에 ‘반(反)외국자본’ 정서가 확산됐다. 가뜩이나 도요타 혼다 등 일본 자동차회사들의 진군으로 디트로이트의 미국 자동차회사들이 휘청거리고, 펜실베이니아의 철강회사들이 일본과 유럽 업체들의 공세에 밀려 문을 닫고 있던 때였다. 미국 기업들의 경쟁력 약화는 일자리 감소로 이어졌고, 외국기업들에 대한 미국인들의 반감은 더욱 커졌다.
바로 이 시기에 로버트 라이시 하버드대 경제학과 교수가 한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1990년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에 게재한 논문 제목은 ‘누가 우리인가(Who is us)?’였다. 요지는 명료했다. ‘누가 우리(미국) 기업이고, 아닌가’를 판단하는 관점을 다시 생각해보자는 것이었다. “어떤 회사가 진정한 미국 기업인가. 일본에서 활동하는 IBM저팬인가, 미국에서 자동차를 만들고 일자리를 창출하며 세금을 내는 도요타아메리카인가.”
‘기업의 소유’에서 ‘기업의 국적’으로
자문(自問)에 이은 그의 자답(自答)은 명확했다. “누가 소유했느냐(owned-by)가 아니라 어느 곳에 둥지를 틀었느냐(based-in)를 기업 국적의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관점을 바꿔 문제의 본질을 새롭게 보자는 주장은 미국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라이시가 진보적인 노동경제학자였기에 더욱 주목을 모았다.
1992년 대통령선거에 민주당 후보로 나선 진보 정치인, 빌 클린턴이 라이시를 영입해 일자리정책 공약을 맡겼다. 그리고는 적극적인 외국기업 유치와 투자 활성화 정책을 통해 800만개의 일자리를 창출한다는 ‘EMJ(Eight Million Jobs) 플랜’을 1호 공약으로 내놓았다. 클린턴은 보수정당의 현직 대통령(조지 H 부시)을 꺾고 당선됐고, 즉각 공약 이행에 착수해 취임 2년 만에 300만개 가까운 일자리를 새로 만들어냈다. 독일의 메르세데스 벤츠, 일본의 도요타와 혼다, 네덜란드의 필립스 등 해외 유수 대기업들의 대형공장 투자를 이끌어낸 결과였다. ‘관점 전환’은 EMJ 프로젝트를 성공시킨 일등공신이었고, 이후의 대통령들이 소속 정당을 막론하고 일관되게 외국자본 유치정책을 추진케 한 원동력이 됐다.
한참 전 미국 얘기를 돌아보는 것은 요즘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 때문이다. 온라인유통업체 쿠팡에서 개인정보 유출사건이 터진 이후 정부와 정치권의 대응이 통상이슈로 불거지고 있다. 미국 행정부와 의회 일각에서 “미국 기업에 대한 차별적 압박을 가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문제 제기가 나오고 있다. 미국 투자회사 두 곳이 “한국 정부가 쿠팡을 차별대우하고 있다”며 미국 정부에 조사를 요청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요즘처럼 글로벌화가 진전된 시대에 한국 정부가 대놓고 특정 외국계 기업을 차별할 이유가 없고, 그래서도 안 될 일이다. 그럼에도 노조와 시민단체, 정치권 일각에서 쿠팡의 ‘기업국적’을 거론하며 공세를 편 것도 사실이다. 미국을 방문한 김민석 국무총리를 만난 J.D. 밴스 부통령과 하원의원들이 쿠팡 문제를 언급하기에 이른 배경일 것이다.
쿠팡의 국적 논란은 모기업인 쿠팡 아이엔씨(Inc)의 대주주가 미국계 한국인 김범석 이사회 의장과 일본 소프트뱅크의 비전펀드 등 외국계 자본이라는 데서 비롯됐다. 정보유출 사고 이후 최고경영자로 한국어를 할 줄 모르는 미국인이 부임하면서 ‘외국계 기업’ 논란은 더욱 불거졌다. 한국의 정서를 잘 모르는 그가 국회 청문회에서 보인 ‘미국식 뻣뻣함’까지 더해졌다. 비슷한 사고가 발생했을 때 총수가 직접 공개석상에 나와 머리를 숙이며 ‘사과 퍼포먼스’를 하는 한국 기업들과 대비되면서 국민들의 불편함이 증폭됐다.
그러나 ‘기분’과 현실은 별개이고, 구별돼야 한다. 쿠팡은 2013년 설립된 이후 ‘직접 물류’ 모델을 도입, 한국의 배송시스템을 근본적으로 바꾼 주역이다. 역대 정부와 정치권이 이마트, 롯데마트 등 기존 대형업체들에 ‘골목상권 보호’ 명분으로 온갖 규제의 족쇄를 채워 ‘독주’의 길을 터준 측면이 있지만, 쿠팡은 새벽배송과 빅데이터를 통한 최저가 상품 판매 등 유통혁신을 앞장서 이끈 기업이기도 하다.
‘쿠팡사태’에 대한 관점의 전환 필요한 때
직접고용 인원 9만명, 배송기사와 협력회사 인력을 합쳐 40만명의 고용생태계를 창출하며 소비자 편익을 향상시킨 쿠팡은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성장해 온 기업이다. 개인정보 유출사고에 대해서는 엄정한 조사와 조치를 통해 재발을 막아야 하겠지만, ‘대한민국이 키운 소중한 자산’으로 쿠팡을 바라보는 관점의 전환도 필요하다. “누가 우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