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구역만 분절…생활권은 이미 초광역화
지역 넘어선 이동 보편화
행정통합 필요성 뒷받침
우리나라 국민 4명 중 1명은 이미 행정구역 경계를 넘어 일하고 소비하며 생활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행정구역은 분절돼 있지만 시민의 삶은 초광역화됐다는 의미다. 최근 정부 지원을 계기로 시·도 행정통합 논의가 본격화되면서 이 같은 생활권 변화와 행정구역 간 괴리가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구조적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전북대 공공갈등지역혁신연구소와 한국리서치가 최근 발표한 설문조사 결과 보고서에 따르면 응답자의 25%는 거주지와 다른 시·군·구에서 일하거나 주요 생활 활동을 하고 있다고 답했다. 직장 의료 소비 여가 등 일상 영역에서 행정구역을 넘는 이동이 이미 보편화됐다는 뜻이다. 특히 수도권뿐 아니라 광역시 인접 지역, 혁신도시·산업단지 주변에서도 이러한 경향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조사는 생활권과 행정구역의 불일치가 지역 소속감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보여준다. 생활권과 행정 경계가 일치하는 응답자 가운데 ‘지역에 소속감을 느낀다’는 비율은 70%를 웃돌았지만, 행정 경계를 넘어 생활하는 집단에서는 이 비율이 50%대로 떨어졌다. 향후에도 현재 거주 지역에 계속 살겠다는 정주 의향 역시 행정구역과 생활권이 일치할수록 높았다.
보고서는 “지역 정체성과 공동체 의식은 행정단위 자체보다 일상적 공간 경험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며 “행정구역이 시민의 삶을 충분히 담아내지 못할수록 지역에 대한 책임감과 참여 의식도 약화될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했다. 행정구역의 경직성이 단순한 행정 비효율을 넘어 민주적 기반까지 흔들 수 있다는 해석이다.
이 같은 여론 흐름은 학계의 구조적 진단과도 맞닿아 있다. 권선필 목원대 교수는 지난 26일 국회 토론회에서 “현행 광역·기초 행정구역 체계는 합리성·효율성·민주성·적응성 측면에서 구조적 한계가 가장 많이 누적된 제도”라고 지적했다. 같은 국가 안에서 입법과 사법 영역은 끊임없이 조정돼 왔지만, 행정구역만은 100년 넘게 고착돼 있다는 것이다.
실제 국회의원 선거구는 헌법재판소 결정에 따라 인구 편차 2대 1 기준이 적용돼 총선마다 조정된다. 사법부 역시 사건 수와 업무량을 기준으로 법원 관할구역을 재편해 왔다. 반면 행정구역은 1914년 일제강점기에 설정된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인구 변화나 기능 조정에 따른 자동 조정 장치가 작동하지 않는 구조다.
이러한 조사결과와 구조진단은 현재 진행 중인 행정통합 논의의 중요한 배경으로 해석되고 있다. 황지은 한국리서치 수석은 “초광역화가 일상화되고 있는 지금 기존 행정구역은 주민의 실제 삶을 더 이상 충분히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며 “이번 조사에서도 생활권–행정구역 불일치가 클수록 지역에 대한 관심이 낮아지는 경향이 나타났다”고 설명했다. 전북대 공공갈등지역혁신연구소을 맡고 있는 하동현 교수는 “행정통합은 단순히 규모를 확대하는 작업이 아니라 생활권에 맞춰 책임과 공동체의 틀을 재조정하는 과정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며 “이번 조사결과는 행정통합 논의의 사회적 배경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강조했다.
김신일 기자 ddhn21@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