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비용부담에 흔들린 미 기술주
반도체 실적 실망에 나스닥 급락 … 젠슨 황 "소프트웨어주 매도는 비논리적"
미국 기업들의 실적 발표가 이어지면서 기술주 전반의 하락세가 이어지고 있다. 인공지능(AI) 기대를 앞세워 주가가 급등했던 반도체·소프트웨어 기업들이 실적 시즌을 맞아 한꺼번에 조정을 받는 모습이다. 시장에서는 “AI 성장 서사 자체가 무너졌다기보다, 기대가 지나치게 앞서갔다는 점이 확인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파이낸셜타임스(FT) 보도에 따르면 4일(현지시간) 뉴욕 증시에서 나스닥종합지수는 1.5% 하락했고,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500지수도 0.5% 내렸다. 전날 소프트웨어주 급락에 이어 이틀 연속 약세다. 기술주 비중이 높은 시장 전반에서 위험 회피 심리가 빠르게 확산됐다.
조정의 출발점은 반도체였다. 반도체 칩 설계 기업 AMD는 실적 발표 직후 주가가 17.3% 급락했다. 2017년 이후 최대 낙폭이다. AMD는 지난해 4분기 매출이 시장 예상치를 웃돌았고 올해 1분기 매출 가이던스도 견조하게 제시했지만, 투자은행 제프리스는 “실적 발표 전 기대 수준이 과도하게 높아졌다”고 지적했다. 실적의 절대 수준보다는 기대 대비 추가 상승 여지가 크지 않다는 판단이 매도세를 자극했다는 분석이다.
스마트폰용 칩을 설계하는 퀄컴도 시장을 실망시켰다. 퀄컴은 이번 분기 매출을 106억달러로 제시했는데, 월가 예상치 112억달러에 못 미쳤다. 직전 분기 매출은 123억달러로 예상에 부합했지만, 성장 속도 둔화 우려가 부각되며 시간외 거래에서 주가는 약 9% 하락했다.
반도체발 충격은 AI 관련주 전반으로 번졌다. 데이터 분석 소프트웨어 기업 팔란티어는 11.6% 하락했고, 메모리 기업 샌디스크는 약 16% 급락했다. 반도체 기업 브로드컴은 3.8%, 소프트웨어 기업 오라클은 5.1%, 엔비디아는 3.4% 각각 내렸다. 블룸버그는 이번 조정으로 AI 관련 종목 전반에서 시가총액 기준 1조달러 안팎이 증발했다고 전했다.
소프트웨어주를 둘러싼 불안은 특히 컸다. AI 기업 앤스로픽 등이 업무 자동화를 강조한 새로운 도구를 잇달아 내놓으면서, 기존 소프트웨어 기업들의 사업 모델이 위협받을 수 있다는 우려가 시장에 확산됐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엔비디아의 최고경영자 젠슨 황은 4일 늦은 밤 시스코 시스템즈 행사에서 강하게 반박했다. 그는 소프트웨어 기업 주가 급락을 두고 “세상에서 가장 비논리적인 일”이라며 “소프트웨어는 도구이고, AI는 그 도구를 사용하는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이어 “드라이버가 필요하다고 해서 드라이버를 없애고 새로운 드라이버를 발명하겠느냐”고 덧붙였다.
젠슨 황은 엔비디아 내부에서도 AI 도구를 적극 도입하고 있다며, 그 결과 직원들이 반복 업무에서 벗어나 반도체와 시스템 설계라는 핵심 업무에 더 집중할 수 있게 됐다고 설명했다. AI가 소프트웨어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소프트웨어의 활용도를 높인다는 주장이다.
그럼에도 시장의 분위기는 단기간에 바뀌지 않고 있다. 블룸버그는 최근 조정을 두고 “AI를 둘러싼 모든 기업이 같은 궤도에 오를 것이라는 믿음이 흔들리고 있다”고 전했다. AI 수혜가 기대되더라도, 실적과 비용 구조, 경쟁 구도가 명확하지 않으면 주가를 방어하기 어렵다는 인식이 강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거시 지표도 투자심리를 압박했다. ADP 고용보고서에 따르면 1월 미국 민간부문 신규 고용은 2만2000명 증가에 그쳐 시장 예상치 4만8000명을 크게 밑돌았다. 고용 증가세 둔화는 경기 모멘텀이 약해지고 있음을 시사하며, 높은 성장 기대를 전제로 평가받아 온 기술주에는 부담 요인으로 작용했다.
시장에서는 최근 변동성 확대의 배경으로 차기 연방준비제도(Fed) 의장 인선 변수도 함께 거론하고 있다. 실적 시즌과 맞물려 통화정책 기조를 이끌 새 인물이 누구인지에 대한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장기 성장 기대에 의존해 온 기술주에 대한 경계심이 높아졌다는 것이다. 한 월가 전략가는 “실적이 기대에 조금만 못 미쳐도 매도가 과도하게 반응하는 것은 정책 리더십 변화에 대한 불안이 깔려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번 실적 시즌은 AI가 여전히 핵심 성장 동력이라는 점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 기대가 어느 수준까지 가격에 반영돼 있었는지를 되돌아보게 한다. 연준 리더십 교체 가능성과 실적 검증 국면이 겹치면서, 미국 기술주는 당분간 뚜렷한 방향성보다는 높은 변동성이 이어지는 장세에 놓일 가능성이 크다.
양현승 기자 hsyang@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