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연금 손자병법

노사가 주도권 쥐는 퇴직연금체계 전환이 관건

2026-02-19 13:00:16 게재

사회적 합의는 시작됐다. 이제 산업현장에서 실행할 차례다. 며칠 전 고용노동부는 “근로자 노후 소득보장을 위한 기금형 활성화 및 퇴직연금 사외적립 의무화, 사회적 합의로 첫발”이라는 보도자료를 냈다. 2005년 도입 이후 21년 만에 퇴직연금 제도의 구조적 개선 방향에 대해 노사정이 처음으로 합의를 이뤘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늦은 감은 있지만 방향은 옳다. 그러나 선언만으로 제도는 바뀌지 않는다. 현장에서 작동해야 변화가 일어난다. 노동조합 위원장들에게 묻고 싶다. 이 변화의 첫 수혜자는 누구여야 하는가. 이번 발표는 퇴직연금이 더 이상 기업 내부의 적립금 관리 영역이 아니라 근로자의 노후 소득보장을 위한 공적 기능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분명히 했다. 주가 5500p 고공 흐름 속에서도 실질임금 상승률은 정체돼 있다. 임금 인상만으로는 노후를 대비하기 어렵다. 그렇기에 퇴직연금은 ‘미래의 돈’이 아니라 현재 임금구조를 보완하는 ‘후불 임금’이다. 이제 임금협상 테이블에 퇴직연금이 함께 올라와야 한다.

‘승리의 구조’를 먼저 만들어라

노사정 합의의 핵심은 가입자 이익 최우선, 수탁자 책임 확립, 확정기여형(DC) 중심 기금형 운영, 선택권 확대에 있다. 하지만 실제 성과로 이어지려면 현장 실행 장치가 필요하다.

관련 법 개정 없이도 시작은 가능하다. 과거 3~5년 평균수익률을 기준으로 이를 초과하는 수익에 대해 노사 합의로 규약을 변경하고 가입자 이익 최우선 원칙에 맞게 구조를 재설계하면 된다.

손자병법 군형편에는 “승병선승 이후구전, 패병선전 이후구승(勝兵先勝 而後求戰, 敗兵先戰 而後求勝)”이라 했다. 이기는 군대는 이미 승리의 구조를 만든 뒤 싸움을 시작하고 지는 군대는 싸운 다음에 승리를 구한다는 뜻이다.

지금까지 퇴직연금은 노사가 돈부터 넣고 금융사업자가 내놓은 성과를 수동적으로 받아왔다. 이제는 구조를 바꿔야 한다. 노사가 먼저 목표 수익률을 설정하고 금융사업자들이 투명한 성과 경쟁을 하도록 해야 한다. 이는 로보어드바이저나 인공지능(AI)이 특정 상품을 추천하는 방식과는 전혀 다른 접근이다. ‘상품 선택’이 아니라 ‘구조 설계’의 문제다.

금융 주도에서 ‘가입자 주도’로 게임의 룰 바꿔야

이제 게임의 룰을 바꿔야 한다. 가입자 이익 최우선 원칙에 따라 금융사업자 주도 구조에서 ‘가입자 자기주도적 운용 기반’으로 전환해야 한다. 이러한 방식은 확정급여채무(DBO)의 산정·적립·지급 의무를 침해하지 않는다.

현행 법체계에서도 허용 가능한 노후소득 시스템의 구조적 전환이며 사회적 합의를 실제로 작동시키는 강력한 실행 엔진이다. 초과 성과의 귀속을 노사 합의로 재배치하는 것이지 추가 급여채무를 발생시키는 구조가 아니다. 국제회계기준(IFRS) 체계 내에서도 충분히 설명 가능한 새로운 프로토콜, 즉 규약의 출현이다.

이 모델이 현장에서 적용된다면 파업 없는 임금 인상이 가능해지고 정치적 논쟁 없이 노사 협력으로 사회적 분배가 이뤄질 수 있다. 세금 추가 부담 없이 노후보장이 가능해지며 국가재정 투입 없이도 사회 안전망을 구축할 수 있다. 자본주의 내부에서 국가가 아닌 노사 협력으로 사회민주주의적 효과를 구현하는 셈이다.

‘K-이해관계자 자본주의’ 시대 열어야

최근 환경·사회·지배구조(ESG) 제도가 확산되는 가운데 노사 간 초과수익 분배는 실제 지표로 평가될 수 있어 국제적 수준의 등급 확보에도 도움이 된다. 국민연금 의존도 감소, 기업의 노후보장 기능 강화, 노사 상생모델 구축, 연금자본의 장기투자 확대, 자본주의 신뢰 회복이라는 선순환도 기대할 수 있다. 이는 기업과 노조의 사회적 책임을 실천하는 ‘한국형 이해관계자 자본주의(K-Stakenholder Capitalism)’ 정립을 위한 첫걸음이다.

금융기관이 주도하는 퇴직연금이 아니라, 노사가 주도해 금융사업자와 소통·관리하는 근로자 자기주도 프로토콜이 필요하다. ‘성과 귀속’만 재배치해도 가입자에게 초과수익이 돌아가고 대립적 노사관계는 협력적 상생 모델로 전환될 수 있다. 우울한 노후가 아닌, 나의 연금을 웃게 하는 길, 그 첫걸음을 시작해보자.

아울러 법에 명시된 교육 의무를 금융사업자에게 맡기는 고양이에게 생선 맡기기식 영업성 교육은 중단해야 한다. 노동부가 인정한 전문교육기관에 위탁하고 1인당 최소 교육비를 설정해 체계적 연금교육이 이뤄지도록 해야 한다. 교육비 하한을 법이나 시행령에 포함하고 정부가 감독한다면 임금만 협상하는 시대를 넘어 연금까지 설계하는 시대를 열 수 있다.

이영하 연금아카데미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