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도 담보…월가 ‘칩 금융화’ 시동

2026-02-20 13:00:01 게재

AI 투자, 석유산업 규모 추월 … 지수·옵션·채권 등 컴퓨트 금융시장 태동

미국 월가가 인공지능(AI)을 새로운 금융자산으로 삼으려는 움직임을 본격화하고 있다.

18일(현지시간) 미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데이터센터 투자 규모가 급증하면서 그래픽처리장치(GPU)와 같은 첨단 반도체가 단순한 기술자산을 넘어 증권·파생상품·담보로 활용될 수 있는 길이 열리고 있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월가의 대표 이미지와 스위스 CERN 서버룸, 엔비디아 칩을 합성한 사진. 출처 챗GPT

올해 미국의 5대 기술기업이 인공지능 시대를 뒷받침할 데이터센터 확충에 7000억달러를 쏟아붓는다. 지난해 석유·가스업계의 탐사·생산 투자액(5700억달러)을 훌쩍 뛰어넘는 규모다. ‘데이터는 새로운 석유’라는 말이 현실이 된 셈이다.

그런데 정작 데이터를 저장하고 연산하는 GPU는 금융시장 내 비중이 극히 작다. 일부 대출에서 담보로 쓰이긴 하지만 가격 산정과 매각이 어렵고, 파생상품 시장도 사실상 없다. 이에 따라 칩과 컴퓨트(처리 능력)가 석유·주택 등이 그랬듯이 월가가 금융화하기에 알맞은 대상이 되고 있고, 이를 현실화하겠다는 혁신들이 잇따라 등장하고 있다.

핀테크 기업 ‘테이크원크로노스’는 컴퓨트 거래 시장을 올해 6월까지 출범시키는 것을 목표로 2020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폴 밀그럼이 세운 ‘옥셔노믹스’와 손잡고 여러 상품을 묶어 경매에 부치는 방식을 추진 중이다. 스타트업 ‘오른(Ornn)’은 엔비디아의 인기 칩 H100을 포함한 각종 칩 가격을 추적하는 지수를 출시했고, 실제 GPU를 대상으로 가격이 급락할 경우 수익이 나는 풋옵션(매도 선택권) 판매도 계획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신뢰할 수 있는 벤치마크와 유동성 높은 파생상품 시장이 결합하면 GPU를 담보로 한 채권 시장까지 발전할 수 있다고 본다. 신용카드 채권이나 상업용 모기지처럼, 투자자들이 세부 기술을 몰라도 표준화된 상품을 통해 위험을 분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런 시장을 만들려면 만만치 않은 장벽을 넘어야 한다. 가장 큰 문제는 더 빠른 칩이 계속 나오면서 기존 칩의 가치가 빠르게 떨어진다는 점이다. 모건스탠리는 이런 흐름이 알파벳·마이크로소프트·메타·오라클 등으로 하여금 앞으로 4년 동안 6800억달러 규모의 감가상각을 기록하게 할 수 있다고 추정한다.

최신 칩과 구형 칩의 격차가 제트기와 마차 수준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이니, GPU 담보대출 투자자 입장에서는 자산가치 급락 위험을 고스란히 떠안아야 한다.

컴퓨트 거래 자체의 어려움도 있다. 이용자는 데이터센터와 어느 정도 가까이 있어야 하며, 연료처럼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실어 나를 수 없기 때문에 지역별 가격 차이가 크게 벌어지고 거래를 통한 수급 조절도 쉽지 않다.

그럼에도 장벽을 넘을 경우 보상은 크다. 파생상품은 칩 가치 폭락 위험을 감수할 거래자에게 수익을 돌려주는 방식으로 위험을 분산시킨다. 대규모 컴퓨트가 필요한 기업과 스타트업들은 칩을 담보로 대출받고 이를 채권으로 묶어 팔 수 있다면 자금 조달이 한결 수월해진다.

이코노미스트는 GPU 혁신의 광풍과 예측 불가한 감가 위험이 어느 정도 잦아들어야 금융화가 빠르게 진행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그러나 위험을 가격으로 매기고, 묶고, 이전하는 금융공학에서 월가의 경쟁력은 독보적이다. 칩을 금융화할 수 있다면 월가는 반드시 이룰 것이란 게 이코노미스트의 전망이다.

이주영 기자 123@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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