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계업계 올해 더 악화된 ‘출혈 경쟁’…감사보수 50% 하락 사례도
한공회, 감사계약 사례 취합 … ‘덤핑 계약’ 확인 나설 듯
지방기업, 감사보수 더 깎아 … 공공기관 입찰도 경쟁 치열
“감사 시간 줄어들 수밖에 없어, 회계투명성 확보 어려워져”
지난해 감사계약을 둘러싼 회계법인들의 출혈 경쟁으로 홍역을 겪었던 회계업계가 올해 더 심각한 상황을 맞고 있다. 출혈 경쟁이 더 치열해지면서 전년 대비 감사보수가 50% 가량 하락한 사례가 속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23일 회계업계에 따르면 한국공인회계사회는 내달 14일까지 회계법인들의 감사계약 사례 전반을 취합하고 있다. ‘덤핑 계약’이 얼마나 되는지 확인에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19일 기업들의 외부감사인 선임 계약이 마무리된 가운데 업계에서는 금융당국으로부터 ‘주기적 감사인 지정’을 받다가 감사인을 자유롭게 선임할 수 있게 된 기업들의 감사보수가 크게 하락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30% 가량 하락한 사례들이 나왔다면 올해는 50% 가량 하락한 경우도 상당수 있다는 것이다.
주기적 지정은 상장기업과 소유·경영 미분리 대형 비상장사 등이 외부감사인(회계법인)을 6년간 자유 선임했다면 이후 3년은 금융당국이 지정하는 것을 말한다.
금융당국의 지정 감사에서 풀린 기업들을 상대로 감사계약을 체결하기 위한 회계법인들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출혈을 감수하면서까지 감사보수를 낮추는 덤핑 수주가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A중견회계법인은 오랫동안 외부감사를 맡았던 B기업이 주기적 지정제 대상이 됐다가 올해 자유 선임으로 풀리자 외부감사를 다시 맡으려고 감사계약을 추진했다. 하지만 감사계약 과정에서 빅4 중 한 곳인 C대형회계법인이 B기업에 전년 대비 50% 가량 낮은 감사보수를 제시했다.
A법인은 오랜 고객이었던 B기업의 감사계약을 유지하기 위해 결국 C법인이 제시한 수준에 맞춰 전년 대비 50% 낮은 가격에 계약을 체결했다.
회계업계 관계자는 “기업들이 관계를 맺고 있는 회계법인에게 ‘다른 회계법인들이 감사보수를 전보다 낮은 수준으로 제시했다’고 하면 그 가격에 맞춰줄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라며 “기업들도 다른 곳에서 덤핑이 들어오는 것을 이용하고 있는 상황이어서 회계법인들 스스로 ‘제 살 깎아먹기’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같은 현상은 주기적 지정제 대상인 상장회사뿐만 아니라 비상장사 감사계약에서도 나타나고 있으며 재무건전성이 악화되고 있는 지방 기업들에서 특히 두드러지고 있다.
올해 감사계약에서는 ‘더 이상 실비 정산을 못해주겠다’고 버티는 지방 기업들이 나오고 있다. 통상 회계법인들은 감사계약을 맺고 그것과 별개로 실비 비용을 지급받아왔다. 지방 기업의 경우 교통비와 숙박비 등 여러 명의 회계사들이 감사업무를 위해 방문하면 그동안 기업들이 실비를 지급했다. 하지만 올해부터는 실비를 주지 않겠다는 것이다.
중소회계법인의 한 회계사는 “지금도 지방 기업들에 대한 외부감사는 정말 최저 금액으로 하고 있는데 감사보수를 더 깎으려고 한다”며 “회계사들의 인건비는 계속 오르고 있는데, 정말 감사를 계속해야 되는지 고민스러울 정도로 직격탄을 맞고 있다”고 말했다.
공공기관에 대한 회계감사 계약도 예외는 아니다. 나라장터를 통한 입찰에서 회계법인들의 출혈 경쟁으로 감사보수가 더 떨어지고 있다. 최근 금융공공기관인 D사의 회계감사 입찰에서 예산금액 대비 70%를 쓴 회계법인이 계약을 낙찰받았다. 회계업계에서는 그동안 80% 수준을 써내면 낙찰받았다는 불문율이 깨졌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공공기관의 회계감사계약에서 가격 점수가 차지하는 비중은 100점 중 20점이다. 20점 만점을 받으려면 예산금액 대비 70%를 제시해야 하기 때문에, 입찰 결과만 봐도 외부에서 ‘덤핑 수주’ 여부를 확인할 수 있다. 회계업계 관계자는 “그동안 90% 정도를 쓰는 게 관례였고 진짜 낙찰을 받고 싶으면 80% 선을 쓰는 게 소위 ‘국룰’이었다”며 “올해 70%까지 내려가면서 경쟁이 걷잡을 수 없게 됐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빅4 회계법인 중 한 곳이 ‘일정 수준 이하로는 수임계약을 체결하지 말라’고 했던 내부 방침을 올해 없앴다는 말이 돌고 있을 정도다.
회계법인들의 치열한 경쟁으로 감사보수가 낮아지는 것은 시장 원리라는 관점에서 보면 당연할 수 있다. 하지만 지나치게 낮은 감사보수는 결국 감사 투입 시간 감소로 이어지고 감사의 질 저하와 부실감사 위험을 키운다는 점이 문제다.
중소회계법인의 한 파트너 회계사는 “헐값 계약이 체결되면 결국 감사 시간을 많이 투입할 수 없게 된다”며 “회계감사는 주주와 이해관계자들에게 기업의 재무 건전성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주는 역할인데, 이런 환경에서는 회계투명성 확보가 어려워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재명 정부는 국정과제에 ‘회계기본법’ 제정을 포함시켰다. 지난해말 박찬대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회계기본법 제정안을 발의했다. 박 의원은 “주식 시장의 투명성과 공정성이 높아지는 상황에서 기업·기관의 경영활동에 대한 신뢰를 높일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정부 수단이 바로 회계 정보”라며 “우리 사회 전반의 투명성을 높이기 위해 회계의 기본을 정의하는 것을 더 이상 미루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주가지수가 5000을 넘어섰지만 낮은 회계투명성은 투자자들의 신뢰 하락으로 이어지며, 결국 시장의 지속 가능한 성장을 제약하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금융당국은 이달 4일 ‘회계투명성 제고를 위한 회계·감사 품질 제고방안’을 발표했다. 과도한 저가수임 경쟁에 대응하기 위해 감사시간 과소투입 등으로 감사기능이 약화된 감사인 및 해당 회사에 대한 심사·감리, 감사인 지정 등 페널티를 부과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여전히 저가수임 경쟁이 이어지면서 당국의 발표가 무색한 상황이다.
이경기 기자 cellin@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