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산책

과학기술 분야 오픈 생태계의 중요성

2026-02-24 13:00:01 게재

‘모든 학문 분야는 소중하다.’ 오늘 글은 이 당연한 문장으로 시작하려 한다. 다양성은 생물학적 생태계뿐만 아니라 대학 기업, 그리고 사회 전반의 회복탄력성을 지탱하는 핵심동력이다. 모든 연구자가 자신의 분야에 투자가 필요하다고 외치는 절박함에는 저마다의 타당한 논리가 있다.

클라크 커(Clark Kerr)가 그의 저서 ‘대학의 쓰임새’에서 역설했듯 현대의 연구는 대규모 자본 투입을 전제로 하며 미국식 연구 중심 대학이나 유럽의 거대 연구소들이 그 모델을 선도해왔다.

하지만 자본의 총량이 곧 혁신의 크기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규모의 경제라는 신화에 균열을 낸 사례들은 이미 도처에 있다. 대표적인 것이 인도의 화성 탐사선 ‘망갈리안(Mangalyaan)’이다. 2014년 인도는 미국 NASA 예산의 1/9 수준인 단돈 1000억원으로 화성 궤도 진입에 성공했다.

반도체 설계의 강자 ARM역시 좋은 예다. 인텔이라는 거인이 제조 시설(Fab)에 수십조 원을 쏟아부으며 규모를 키울 때 영국의 작은 팀이었던 ARM은 직접 제조하는 대신 ‘설계도(IP)’를 공유하고 라이선싱하는 생태계 전략을 택했다. 그 결과 오늘날 전 세계 스마트폰의 99%는 덩치 큰 인텔이 아닌, 유연한 ARM의 생태계 위에서 작동한다. 리눅스(Linux) 커널 또한 수조 원의 개발비를 들인 상용 OS들을 제치고 전 세계 서버와 슈퍼컴퓨터를 점령했다. 자본이 아닌 '연대와 공유'가 독점을 이긴 혁신의 정점이다.

‘규모의 경제’라는 딜레마

지난 2년간 대학의 복잡한 예산 행정을 경험하며 절감한 사실은 자원은 늘 부족하며 ‘최선의 투입’을 결정하는 과정은 고통스러울 만큼 어렵다는 점이다. 한국은 2024년 기준 국가 R&D 투자액이 약 130조원에 달하며 GDP 대비 투자 비중은 세계 2위를 다툰다. 그러나 세계 대학 평가에서 100위권에 이름을 올린 국내 대학들조차 피인용도 기준의 실질적 연구 영향력은 그 위상에 한참 못 미친다.

특히 인공지능(AI) 등 전략 기술 분야에서 미국과 중국의 물량 공세에 맞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지만 냉정한 수치는 우리에게 전략적 선택을 고민하게 한다. 2026년 기준, 미국과 중국은 각각 실질 구매력(PPP) 기준 연간 1350조원에 달하는 천문학적인 자금을 R&D에 투입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구글은 2025년 R&D 비용만 약 90조원 규모다. 국가 단위 투자를 넘어서는 ‘민간의 스케일’이 이미 현실이 되었다는 뜻이다. 우리는 규모의 경제에서 그들을 이길 수 없다.

현재 유행하는 특정 분야에만 자원을 몰아주는 전략은 결국 미래의 씨앗이 될지 모르는 수많은 기초학문의 희생을 강요하며 생태계를 빈곤하게 만든다. 다양성이 거세된 환경에서는 다음 세대를 구원할 ‘뜻밖의 돌파구(Serendipity)’ 또한 기대하기 어렵다. 혁신은 종종 대규모 투자가 이뤄지는 주류가 아닌 변두리에서, 작은 팀의 집요함에서 나온다.

거대 기업과 미중 패권국가의 기술 독점에 맞서는 가장 현실적인 전략 중 하나는 오픈소스·오픈데이터 기반의 국제협력을 활성화하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기술을 ‘모두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이 머무는 생태계를 주도하는 것이다. 모든 모듈을 직접 만들기보다 핵심 병목을 선점하고 나머지는 글로벌 네트워크와 표준 위에서 해결하는 연결의 경제가 필요하다.

모든 모듈을 독자 개발하려 애쓰는 대신 글로벌 오픈 소스 프로젝트에 주도적으로 기여하고, 의사결정에 참여하며, 핵심적인 병목 기술을 선점해야 한다. 이는 폐쇄적 소버린이 아닌, 가치를 공유하는 파트너들과의 개방성 위에서 성립하는 ‘연결의 경제’다. 강점 분야를 명확히 정하고 글로벌 생태계의 핵심 노드로서 기능하는 네덜란드와 싱가포르의 사례는 우리가 가야 할 길을 명확히 보여준다.

국책 과제가 생태계의 주류라면 소규모 과제는 생태계의 토양이다. 규모의 경제에 기대지 않고도 자생할 수 있는 ‘작지만 강한’ 연구 그룹들이 글로벌 파트너십을 맺을 수 있도록 행정적·재정적 뒷받침이 필수적인 것도 잊으면 안될 것이다.

소버린의 재정의 - ‘국산품 애용’을 넘어

과거로부터 우리나라에서는 독자기술 확보가 대형 연구비 요구의 핵심 키워드였고, 최근 유행하는 ‘소버린’도 같은 맥락에 있다. 소버린은 중요하다. 특히 안보, 표준, 데이터 주권은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 다만 소버린을 ‘국산품 애용’으로 축소하거나, 모든 것이 메이드인 코리아이어야한다거나, 대규모 투자와 1대1로 대응하는 관점에 머물면 길을 잃는다.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은 총액이 아니라 지렛대다. 개방성과 글로벌 협력, 오픈소스라는 지렛대를 적극 활용해 “우리가 없으면 생태계가 굴러가지 않는 지점”을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규모의 경제를 넘어서는 시대에, 우리가 당면한 경제·사회 문제를 풀어낼 수 있는 현실적인 전략이 될 것이다.

홍진규 연세대 교수, 대기과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