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책

불굴의 의지로 불가능에 맞서 일군 산업역군들의 이야기

2026-04-10 13:00:10 게재

기술자립 목표로 항해에 나서다 … 천금같이 여긴 사람과의 인연들 김우중 회장, 존 리 케터필러 회장, 잭 웰치 GE 회장

윤영석 회고록│기적을 만들던 순간들, 역시 사람이었다

저자 윤영석은 1964년 한성실업에서 시작해 대우실업, 대우중공업(주), 대우조선공업(주), (주)대우 무역부문 대표이사 사장, 대우중공업(대우종합기계+조선) 대표이사 회장, 대우그룹 총괄회장을 거쳐 한국중공업 대표이사 사장, 두산중공업 대표이사 부회장 등을 지냈다. 그의 이력이 말해주듯 저자는 우리 산업화 역사의 한 부분이다.

윤영석/ 생각의창/ 2만원

윤영석 회고록은 산업화 1세대가 악조건을 뚫고 성공을 이뤄가는 과정을 육필로 쓴 생생한 역사책이다. 세계 곳곳을 누비던 경영자와 사원들, 밤낮없이 일하던 노동자들, 공장을 꽉 채우고 교향곡처럼 울려 퍼지던 기계음들, 곳곳에 밴 윤활유 냄새. 이 책은 당시를 함께했던 60~80대에게는 추억과 보람, 보상을, 청년 세대에게는 창업의 희망과 용기를 북돋울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한성실업에서 시작된 김우중 회장과 35년 2개월 인연 = 저자 인생 여정의 특징은 사람과의 관계를 중시하고 그 인연을 믿음으로 이어간다는 점이다.

한성실업에서 만난 김우중 회장이 대우실업을 창업하자 저자도 합류했다. 이렇게 시작된 인연은 35년 2개월간 이어졌다. 20평 남짓 크기의 사무실에서 시작한 조그만 오퍼상 대우실업은 10년이 지나면서 미싱 1만대와 노동자 1만여명이 밤낮으로 일하는 봉제공장으로 발전해 미국으로 수출했다.

미국 성인 셔츠는 모두 대우 제품이라는 말이 돌 정도였다고 한다. 저자가 4년여에 걸친 시어스 백화점 바이어와의 면담 요청 끝에 납품을 성사시킨 일은 전설로 남아 있다. 섬유 중심의 대우실업은 대우종합상사로 커져갔다. 연 350만달러 수출이 1년 만에 1억달러, 그 다음 해 10억달러를 넘는 초대형 상사로 번창했다.

저자는 대우그룹에 있으면서 김 회장의 지시를 한번도 어긴 적이 없다고 회고한다. 김 회장도 윤 회장을 믿고 세세한 지시는 하지 않았다. 저자는 스스로 방향을 잡고 그를 믿어주는 직원들과 함께 세계를 항해했다.

◆대우중공업에서 시작된 MIPA 운동 = 김우중 사장의 명으로 대우중공업으로 옮긴 저자는 기술 국산화를 목표로 엔지니어들과 열정을 쏟았다. 저자가 대우중공업 사장을 맡은 1980년 3월은 1979년 오일쇼크 여파로 세계 경제가 불황에 허덕이던 때였다. 기계는 먼지를 뒤집어쓴 채 멈췄고 일감이 없어 잡초 제거로 일과를 메웠다. 저자는 먼저 낭비를 줄이고 기강을 바로 세우는 일에 나섰다. 유명한 대우중공업의 MIPA(불황 극복을 위한 경영 합리화) 운동이 시작됐다.

사원들은 모두 최고경영자의 방침에 따라 업무를 개선할 아이디어를 내고, 구체적인 실천 계획을 분기별로 기록한 후 기간이 지나면 외부 평가를 받도록 했다. 상하 직급 간의 간격과 부서 간의 벽을 허물었다. MIPA는 한국 제조업 문화의 초석이 됐다.

사내에 국산화추진본부를 신설했다. 굴삭기를 100% 국산화하면서 대우굴삭기 ‘솔라’가 탄생했다. 연 100대에서 2만5000대 생산·수출로 급증하면서 한국은 굴삭기 생산 강국이 됐다. 관련 부품을 생산하는 국내 중소기업들도 세계 최강으로 성장했다.

◆세계 1위 중장비 회사 케터필러 존 리 회장 = 세계 1위 중장비 회사인 케터필러가 한국을 찾아 불도저 로더 굴삭기 등 중장비 생산 파트너를 찾았다. 대우중공업 굴삭기 공장을 방문한 후 존 리 케터필러 회장은 저자를 미국으로 초청했다. 그는 그룹 계열사 사장들을 모아 만찬을 열고 매우 우호적으로 저자를 소개했다. 이 자리에서 지게차 책임자 텀블 사장을 만났다. 그러나 미국에서 진행된 본 계약 체결은 무산됐다. 계약서는 손해배상 조항이 빽빽한, 수용할 수 없는 내용들로 가득 차 있었다.

돌아오던 비행기에서 저자는 텀블 사장에게 ‘사업을 함께한다’는 원칙이라도 합의하자고 제안했고 텀블은 흔쾌히 받아들였다. 둘은 인근 공항에 착륙해 호텔을 잡고 합의안을 작성했다. 법적 구속력이 없는 3개 항 합의서였지만, 케터필러와 대우중공업은 상호 신뢰로 약속을 이행해 나갔다.

◆지게차 연 100대 생산에서 1만대 생산공장으로 변모 = 연간 100대를 생산하던 공장에서 연 1만 대를 생산하는 공장으로 변모하는 모습은 상상하기 어렵다. 계약서도 없이 대우는 대규모 공장을 짓고 이에 호응해 기술자들을 보내준 케터필러. 강한 신뢰가 없고는 생각하기 힘든 모습이었다.

이 과정에서 대우지게차는 100% 국산화됐고 부품을 공급하는 국내 중소기업들은 밀려드는 일감으로 밤을 새웠다.

국산화는 공작기계, 디젤엔진, 철도차량, 장갑차, 항공기 기체, 잠수함으로 이어졌다. 특히 공작기계 국산화는 곧 한국 기계공업의 자립을 뜻했다. 이후 우리나라 공작기계는 독일·일본을 제치고 세계를 석권했다. 대우중공업이 ‘대한민국 기계사관학교’로 불린 이유다.

◆대우조선, 공정 혁신으로 세계 최고가 되다 = 저자가 맡은 대우조선소는 거대한 녹슨 쇳덩이들의 무덤이었다. 겉으로는 흑자였지만 실제로는 적자와 불량투성이였다. 공정에 질서가 없고 매뉴얼이 없어 작업 현장은 혼돈 그 자체였다. 조선은 수많은 공정이 유기적으로 맞물려야 하고, 설계·기자재·용접·도장 어느 한 부분이라도 어긋나면 안 된다. 전 직원이 하나로 뭉쳐 서로를 믿어야 배 한 척이 진수된다.

체계적인 품질관리 시스템을 만들고 제2도약을 위한 경영혁신 플랜(MAST)을 추진했다. 하나의 방대한 조선 공정 지도, 일종의 두뇌인 옥포생산시스템(OPS)을 만들었다. 수주에서 인도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을 관통하는 세밀한 매뉴얼의 집합이었다. 이를 기준으로 자재 목록표가 만들어졌다. OPS 도입 후 선박 건조 기간이 절반으로 줄었다.

◆담수설비와 발전설비, 아부다비 정부 실력자 = 1998년 외환위기 국가부도 상태에서 저자는 공기업인 한국중공업 사장으로 임명됐다. 회사는 본부별로 분파적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저자는 조직을 기능 중심으로 통합하고 기구를 재구성했다. 이 과정에서 역량을 발휘한 직원들을 중용하며 회사 분위기를 바꿨다. 복잡한 제품들을 걷어내고 원전 보일러 터빈 담수화설비 등 4개 분야로 단순화했다.

담수·발전 플랜트를 통째로 조립해 바다로 실어 보내는 ‘원모듈 공법’을 개발했다. 이를 통해 24개월 걸리던 작업을 8개월로 단축했다. 그 결과 한국중공업은 세계 담수화설비 시장의 40%를 차지하고 중동에서는 60%를 점유하게 됐다.

◆프랑스·이탈리아·일본과 입찰, ‘꼴찌’에서 뒤집어 =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 후자이라 발전소 담수 공사 입찰은 지금도 회자된다.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이 참여한 입찰에서 가격 기준으로 꼴찌를 했다. 미국 출장 중 이 소식을 접한 저자는 아부다비로 날아갔다. 설비 가격 기준으로는 꼴찌였지만, 생산 전력과 담수의 원가를 기준으로 보면 최종 생산물이 가장 싸다는 점이 간과된 것을 발견했다.

저자는 평소 친분이 있던 이 나라의 정부 실력자에게 면담을 요청하고, 설명 자료를 밤새 세밀하게 준비했다. 실력자는 한 달의 여유를 줄 테니 입찰 서류를 다시 제출하라고 요구했다. 책자 8권으로 된 기술서를 포함한 입찰서를 다시 제출했고, 결과는 성공이었다. 이후 이 독보적인 기술은 담수설비 국제 입찰의 기준이 됐다.

◆발전터빈 제작을 맡긴 잭 웰치 GE 회장 = 발전설비도 생산 공정을 바꿔 34개월 걸리던 작업을 18개월로 단축하면서 경쟁력이 높아졌다. 중동 지역은 발전설비를 수주하면 담수화설비 공사도 함께 따라왔다. 발전 터빈은 잭 웰치 GE 회장과의 오랜 인연으로 협조가 원활했다. 그는 공정·업무의 변동을 줄여 결함을 최소화하고 품질을 예측 가능하게 만드는 품질 개선 방법론인 ‘식스 시그마(six sigma)’의 전도사였다.

잭 웰치를 만난 저자는 대우중공업이 시행하는 MIPA 운동을 소개했다. 이후 잭 웰치는 한국에 오면 꼭 저자를 찾았다. GE는 터빈을 외주 제작하면서 이를 한국중공업에 맡겼다. 이는 저자와의 오랜 인연과 신뢰의 결과였다. 저자는 한국중공업이 두산중공업으로 민영화된 이후 부회장으로 근무하다 1년 6개월 만에 물러났다.

저자는 “나는 이 책을 그 시절 함께 불굴의 의지로 불가능에 맞섰던 우리나라 산업역군들의 이야기로 채우고 싶었다. 이 책은 한 사람의 성공담이 아니라, 산업의 불모지에서 길을 닦아 온 수많은 사람들의 기록이다. 기계공업의 씨앗을 뿌리고 도전과 실패, 성취를 거듭하며 이 나라의 근간을 세운 사람들. 그들의 땀방울 하나하나가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들었다”며 당시 함께 땀 흘린 동료들에게 감사를 표했다.

창업을 꿈꾸는 청년들에게 이 책의 일독을 권한다.

두산중공업 대표이사 부회장 당시 윤영석 저자. 사진 생각의창 제공

■저자 윤영석 =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주립대학 대학원 경영학 석사이며 러시아 IMEMO에서 명예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64년 한성실업을 시작으로 대우실업, 대우중공업(주), 대우조선공업(주), (주)대우 무역부문 대표이사 사장, 대우중공업(대우종합기계+조선) 대표이사 회장, 대우그룹 총괄회장, 공기업인 한국중공업 제13대 대표이사 사장, 두산중공업 대표이사 부회장, 진성티이씨 회장 등을 지냈다.

이 밖에 한국기계연구원 이사장, 한국공작기계공업협회 회장, 한국조선공업협회 회장, 전경련 기업경영위원회 위원장, 한국기계산업진흥회 회장, 한국플랜트수출협의회 및 한국플랜트산업협회 회장, 주한 우간다 명예영사, 대한요트협회 회장, 한·인도/한·이란/한·독/한·몽골/한·체코 민간 경제협력위원회 위원장, 국제로터리 3650지구 총재, 국제로터리 재단 이사, 서울사회복지공동모금회 회장, 한국로터리장학문화재단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수상 이력으로는 수출 유공 대통령 표창장, 모범납세자 석탑산업훈장, 수출 유공 동탑산업훈장, 이탈리아 대공로 훈장 기사장, 한국품질대상, 품질관리 유공 금탑산업훈장, 제41회 대한민국 체육상, 올해의 공작기계인상 등이 있다.

대우 신화의 숨은 주역으로 신입 사원에서 시작해 총괄회장에 이른 입지전적인 전문경영인이다. 현재 해암경영컨설팅 회장으로 일하고 있다.

문진헌

내일신문 대표이사 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