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지 범주로 본 실리콘밸리 성공 이유
관습, 코드, 학술적 논고, 이야기 … 찰스 틸리의 책 ‘왜(WHY) 쓸모’로 읽는 혁신생태계
인연을 소중히 여겨야 하는 까닭은 뜻밖의 자극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달 업무 상 세종에 갔다. 회사 생활을 꽤 오래 했지만 어쩐지 세종에 갈 일이 없었다. 점심에 시간이 비어 아끼는 후배 둘에게 연락을 했다. 둘은 미국 실리콘밸리에 근무할 때 맺은 인연이다. 국가공무원인 이들은 두 해 전 미국 서부로 출장을 왔다.
당시 실리콘밸리 근무 중이던 필자는 혁신생태계를 소개하는 일을 맡았고 3년 동안 발굴한 아지트를 총동원했다. 그럭저럭 재미가 있었는지 한국에 와서도 인연은 계속됐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후배가 묻는다. “그런데 혹시 이거 읽어보셨어요?” 선물 받은 책 제목은 '왜(WHY)의 쓸모'였다. 처음 보는 책이었으나 사회학 전공자로서 미국의 저명 사회학자 ‘찰스 틸리’가 저자라는 사실을 알고 마음이 동했다.
책을 펴자마자 서지 정보부터 본다. 한국어 번역본이 나온 건 작년이지만 책은 2006년 미국에서 처음 출간됐다. 사실 이 책은 2004년 틸리가 ‘사회학이론’ 저널에 게재한 10쪽짜리 소논문을 확장해 단행본으로 만든 것이다.
틸리는 9.11 테러의 이유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이 ‘왜’라는 질문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관찰하고 유형화했다. 그의 분류에 따르면 사람들은 네 가지 범주에서 이유를 댄다. 관습(Conventions), 코드(Codes), 학술적 논고, 이야기(Stories)가 그것이다. 한국에서도 혁신생태계를 논할 때마다 “왜 실리콘밸리는 성공했는가”에 대한 수많은 이유를 제시한다. 이를 넷으로 분류할 수 있다.
실리콘밸리를 관습과 코드로 보기
우선 관습에 기반한 설명이다. 관습은 “미국이니까, 시장이 크니까, 돈이 많으니까” 정도의 이유를 댄다. 성공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라는 뜻이다. 미국은 어떤 산업이든 시장이 크지만 그렇다고 해서 누구나 반드시 성공하는 건 아니다. 출판시장 사례를 들고 싶다. 책을 몇권 낸 입장에서 한국 출판인들을 만나면 언제나 미국 출판시장 규모를 말한다. 작가로서 미국에서 책을 내면 밥벌이할 수 있는 확률이 높다는 뜻이다.
'와일드'의 ‘셰릴 스트레이드’가 반례다. 그는 운이 좋아 세계적 베스트셀러를 냈지만 책이 잘 되기 전에는 카드빚이 8만5000달러였다. 늘 집세를 내지 못해 전전긍긍했다. 그저 미국이기 때문에, 시장이 크기 때문에, 자본이 많기 때문에 실리콘밸리가 성공할 수 있었다는 관습적 설명은 맘이 편하지만 감정적 위안에 그칠 수밖에 없다.
다음은 코드다. 단행본에는 코드로 표현했지만 원 논문에서는 ‘코드에 따른 정당화’라는 말을 썼다. 여기서 코드는 법, 규정, 딱 떨어지는 숫자로 생각하면 쉽다. 코드에 따른 정당화는 이유를 댈 때 “법이 그렇기 때문에, 특별한 규정이 있기 때문에, 숫자가 대변하기 때문에”라고 말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실리콘밸리의 성공요인을 훌륭한 인재에서 찾는다. 주변에 세계적 대학이 있기에 우수한 인재를 구하기 쉽고 그만큼 좋은 아이디어가 나왔다는 뜻이다. 주로 언급하는 대학은 스탠퍼드와 UC버클리다. 이를 코드로 치환하면 US뉴스가 발표한 2025-2026년 글로벌 대학 랭킹에서 스탠퍼드는 3위였고 UC버클리는 6위였다. 숫자가 주는 권위가 분명하다.
하지만 코드에 따른 접근도 이유로 충분하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1위를 차지한 하버드, 2위를 기록한 메사추세츠공과대학(MIT)이 있는 동부는 왜 혁신생태계가 실리콘밸리만큼 발달하지 못했을까.
물론 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실리콘밸리에 비견되는 혁신생태계가 동부에도 있었다. 이름하여 루트128(Route 128)이다. 루트128은 매사추세츠주 보스턴 외곽을 지나는 국도로 이 지역은 2차세계대전 이후 미국 전자산업을 선도했다. 특히 미니컴퓨터 산업의 성장으로 루트128은 1980년대 미국을 대표하는 혁신 중심지가 되었다. 메인프레임과 개인용 컴퓨터의 중간 정도 용량 성능 가격대였던 이 중형 컴퓨터는 1980년 260억달러 규모로 미국 컴퓨터 산업의 34%를 차지했다. 루트128의 기업들은 미니컴퓨터 시장의 2/3를 잠식했다.
창업자와 엔지니어는 대부분 하버드와 MIT 출신이었다. 당대 1, 2위를 다투던 대학이다. 최고 인재가 즐비했지만 혁신생태계로서 루트128은 이후 쇠락을 거듭했다. 왜 그럴까. ‘코드에 따른 정당화’만으로는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동부지역 루트128이 실패한 이유는
여기서 학자들이 등장한다. 이유를 설명하는 세번째 범주는 ‘학술적 논고’다. 학자들은 자신의 전공 지식과 연구를 바탕으로 현상에 접근한다. 실리콘밸리와 루트128을 비교한 대표적 학술 연구는 UC버클리 정보학 교수 애너리 색스니언이 했다. 그가 1994년에 발표한 책 ‘지역적 이점’의 부제는 ‘실리콘밸리와 루트128의 문화와 경쟁’이다.
그는 정보학자로서 문화적 관점에 기반해 두 지역을 비교한다. 그에 따르면 실리콘밸리의 성공 비결은 ‘협력과 경쟁’이다. 실리콘밸리의 분권화된 경쟁의식은 지속적 혁신을 요구했고, 혁신을 이루기 위해서는 다시 기업 간 협력이 필수적이었다는 점을 이유로 든다.
실리콘밸리에서는 개인과 기업이 주도권을 쥐고 기술 진보를 이루는 것보다 높게 평가받는 것은 없다. 하지만 이를 이루기 위해 기업과 개인은 실리콘밸리 네트워크가 축적한 정보 기술 경험에 의존해야만 했다는 뜻이다. 반면 루트128의 쇠락 이유를 설명하며 색스니언이 제시하는 키워드는 ‘독립과 위계’다. 실리콘밸리 기업가들이 지역과 사회·기술 네트워크에 기초한 산업 시스템을 창조하는 동안 루트128의 기업가들은 독립 기업에 기반한 산업 질서를 물려받아 재현하려 했다.
루트128의 기술 기업들은 자부심이나 다름없던 동부 비즈니스의 자급자족 관행과 구조를 채택했다. 개인과 기업 간 관계는 비밀주의와 배타성이 지배적이었다. 기업 내부에는 전통적 위계 구조가 만연했다. 지역 기관과는 관계가 소원했고 적대적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루트128은 사회적·상업적 상호 의존성이 결여된 자율적 기업의 집합체로 남게 됐다.
‘STORY’는 쉽고 공감 가는 서사
현상을 분석하는 학술적 논고는 설득력이 있지만 어렵고 딱딱하다. 이를 보완하는 건 결국 사람들의 ‘이야기’다. 이유를 설명하는 네 번째 범주인 ‘스토리텔링’은 우리에게 왜 서사가 필요한지를 보여준다. 색스니언도 실리콘밸리와 루트128을 비교하며 자신의 주장을 강화하기 위해 사람들의 이야기를 가져온다. 상반된 두 이야기를 들어보자.
먼저 루트128을 떠나 실리콘밸리로 이주한 한 임원 얘기다. “실리콘밸리 네트워크는 회사에 대한 충성심을 초월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공정하게 대하고 그들은 우리에게 충성하지만 훨씬 높은 차원의 충성심이 존재합니다. 출근하며 자신이 회사가 아니라 실리콘밸리를 위해 일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아주 많습니다. 네트워크에 대한 충성심이죠. 우리 회사 엔지니어들은 경쟁사 사람들과 끊임없이 정보를 공유합니다. 저는 제 경쟁자들이 강연에서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그들도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반대로 실리콘밸리를 떠나 루트128로 이주해 ‘스트라투스’를 창업합 빌 포스터는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동부에서는 모든 이의 가족이 몇 세대를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곳에서는 뿌리와 안정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만약 당신이 실리콘밸리에서 실패하면 당신의 이웃들은 상관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모두가 크게 걱정합니다. 실패한 다음 부모님, 조부모님을 찾아뵙는 건 무척 힘든 일입니다.”
색스니언이 학술적 논고로 정리한 이유를 업계 당사자들이 자신의 이야기로 풀었다. 쉽기도 하거니와 공감도 간다.
실리콘밸리 근무를 마친 지 2년이 지난 지금, 필자에게 실리콘밸리 혁신생태계의 성공 요인을 말하는 일은 여전히 복잡하고도 미묘한 작업이다. ‘왜의 쓸모’를 읽으면서 조금이나마 자신감을 회복했다. 관습과 코드에만 기대 얼버무리기에는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실리콘밸리의 중요성이 아직도 크다. 필자에게도 어떤 소명이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학술적 논고를 이야기로 풀어내는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