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략기술 연구도 ‘수도권 블랙홀’
연구소 63.5% 집중 … AI·반도체 등 4개 분야 연구소 75% 몰려
#1. 충청권 한 대학에서 반도체 공정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김 모씨는 지난해 수도권 반도체장비 기업 연구소로 자리를 옮겼다. 지방 대학 연구실에서는 연구 장비와 프로젝트 확보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씨는 “연구를 계속하려면 수도권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말했다.
#2. 강원지역의 한 중소기업은 인공지능(AI) 연구소 설립을 추진했지만 연구 인력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채용 공고를 여러 차례 냈지만 석·박사급 지원자는 대부분 수도권 연구소를 선택했다. 회사 관계자는 “연구 환경과 협력 네트워크 때문에 인력들이 수도권을 선호한다”고 말했다.
연구 인력 이동과 함께 연구소 입지도 수도권으로 집중되고 있다.
4일 한국산업기술진흥협회 산업기술혁신연구원이 발표한 ‘국가전략기술분야 기업연구소 및 연구인력 현황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국가전략기술 기업연구소는 8569개다. 전체 기업연구소의 20.8%를 차지한다.
이 가운데 5444개(63.5%)가 수도권에 위치한다. 비수도권은 36.5%에 그친다. 강원특별자치도(1.3%) 전북특별자치도(1.2%) 제주특별자치도(0.9%) 등은 전략기술 연구 기반이 매우 제한적인 수준이다.
기술 분야도 일부 산업에 집중됐다. 12대 국가전략기술 가운데 인공지능, 반도체·디스플레이, 첨단 바이오, 이차전지 등 4개 분야에 연구소의 약 75%가 몰렸다. 양자(0.3%) 차세대 원자력(0.6%) 사이버보안(1.6%) 등은 연구 기반이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다.
연구조직 규모 역시 작다. 전략기술 연구소의 93.5%가 종업원 300인 미만 중소 규모다. 연구인력 5인 미만 조직이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보고서는 이 같은 구조가 연구 인력 수급 문제와도 연결된다고 분석했다. 전략기술 분야 연구인력 부족 인원은 6886명으로 전체 기업연구소 부족 인원의 45.6%를 차지한다. 석사 부족 인원의 51.4%, 박사 부족 인원의 60.8%가 전략기술 분야에 집중됐다.
채용 미스매치도 나타난다. 전략기술 분야 연간 채용 인원은 1만1288명으로 구인 인원 대비 채용률은 87.6%다. 첨단로봇·제조, 사이버보안, 양자 분야는 채용률이 80% 미만이다.
보고서는 “소규모 연구 조직 중심으로 분산 수행되는 구조가 인력 수급 애로와 경력직 선호, 미충원 문제와 연결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연구개발 투자 구조 역시 수도권 중심이다. 통계청과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국가과학기술지표에 따르면 수도권(서울·경기·인천)의 연구개발비 비중은 전체의 70.1%에 달한다. 대전까지 포함하면 79.3%에 이른다.
연구개발 수행 구조도 기업 중심이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연구개발활동조사’에 따르면 국내 연구개발의 81.4%는 기업이 수행한다. 대학 연구개발 비중은 8.4% 수준이다.
연구소와 연구개발 투자, 기업이 수도권에 밀집된 상황에서 연구 인력 역시 수도권으로 이동하는 구조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수도권에는 대기업, 연구기관, 주요 대학, 투자기관이 밀집해 있다. 연구 장비와 협력 네트워크, 경력 확장성 측면에서 유리하다. 반면 지방 연구소는 채용 경쟁에서 불리하고 채용 이후에도 인력 유출 위험을 안는다.
연구소와 인력이 수도권으로 빨려 들어가는 ‘수도권 블랙홀’ 구조가 형성된 셈이다.
이 문제는 대학 정책과도 연결된다. 전략기술 인력 부족의 상당 부분이 석·박사급에서 발생하지만 지역 대학의 연구 기반은 빠르게 약화되고 있다. 학령인구 감소와 재정 압박 속에 지방 대학은 이공계 대학원 유지에도 어려움을 겪는다.
전략기술 특화 대학원과 산학협력 프로그램은 확대되고 있지만 실제 취업과 연구 연계는 수도권 기업 중심으로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 지역에서 인력을 양성하고 수도권 산업이 이를 흡수하는 구조가 고착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전략기술 육성 정책이 산업 경쟁력 강화 정책인지, 아니면 수도권 산업 육성 정책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질문도 제기된다. 국가전략기술을 12개 분야로 지정해 육성하고 있지만 실제 연구 생태계는 일부 산업과 수도권에 집중된 구조라는 지적이다.
전략기술 경쟁력 강화와 지역 균형발전을 동시에 달성할 수 있는 정책 설계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대목이다.
장세풍 기자 spjang@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