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로

뉴이재명과 586, 그리고 유토피아

2026-03-05 13:00:02 게재

유토피아, 오래 전에 등장해 너무나 잘 알려져 있고 한참 동안 쓰였으나 요새는 잘 쓰이지 않는다. 요새 학자들이든, 오랜 친구들이든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세 가지 주제가 있다. 부동산, 주식 그리고 인공지능(AI)이다. 얼마전 풍광이 아름다운 산봉우리에 오른 사람들조차 이 주제들로 열띤 대화를 나누는 것을 목격하기도 했다.

부동산과 주식과 AI가 유토피아를 꿈꾸는 사람들의 상상과 욕망을 지배 혹은 대표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도, 부정해서도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혹시 유토피아라는 말은 사라진 게 아니라 부동산과 주식과 AI로 대체되어진 건 아닐까.

누구나 자산을 증식해 구태여 힘들게 일하지 않아도 혹은 자기 하고 싶은 일(만)하며 마음대로 살아갈 수 있다는 유토피아의 의미와 이미지도 갖고 있으니 꼭 틀린 생각도 아니겠다 싶었다.

한편으로는 유토피아라는 말이 만들어지고 널리 퍼졌던 이유가 사실 인클로저 운동으로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 생존조차 어려운 사람들의 현실이었음을 감안할 때도 그렇다. 다수 보통사람들의 경우 부동산이든 주식이든 자산을 보유하고 늘려놓지 못하면 AI가 자신을 쫓아내고 잡아먹는 양이 되는 것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세계가 되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부동산이든 주식이든 그 시장에서 성공하는 사람이 실제로는 썩 많지 않음을 알면서도 또 코스피 5000, 6000이 넘었다고 삼성전자 주가가 20만원을 넘어섰다고 환호를 지른 지 불과 며칠 새에 미국과 이란의 충돌로 급격히 하락세로 접어드는 불안정한 곳임을 알면서도 열중하는 것이리라. 오히려 그 불안정성이 기회를 줄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도전한다는 게 ‘유토피아다움’ 아니겠는가.

코스피 불장 속 등장한 ‘뉴이재명’ 현상

이런 세상의 흐름 속에 최근 눈길을 끄는 정치현상이 있다. 이른바 ‘뉴이재명’의 등장이 바로 그것이다. 주식투자를 통한 자산증식을 독려하는 것이 특징 중 하나인 이재명 대통령의 중도보수실용주의 노선을 지지하며 반(비)국민의힘-친민주이재명 세력의 핵심으로 새롭게 등장한 정치 고관여층이다.

언론과 학계 일각에서는 이들이 586세대-정치인들에 대해 비우호적 적대적이라고 말한다. 낡아버린 진보의 이념과 진영에 갇혀 별 효용도 없는 적대정치를 구사하며 이 대통령의 발목을 잡는다는 이유에서라고 한다. 더불어민주당과 조국혁신당의 통합도 이들이 무산시켰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들과 586세대 간의 반복과 대립이라는 지지층 내부의 균열과 갈등이 이 대통령과 정권의 안정성을 위협할 수 있다고 전망한다. 필자도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이런 시각은 편향적이다. 뉴이재명의 자산증식 욕망을 단지 물질주의적이고 실용적인 반(비)유토피아적이라고만 이해하기 때문이고, 586세대-정치인들을 여전히 이상적이고 유토피아적이라고만 간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여전히 현실주의 vs 이상주의라는 낡은 구도에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자산증식에 대한 욕망은 그 자체라기보다 어려운 삶의 현실에서 들어설 수밖에 없던 ‘벗어남(해방)’의 방편에 불과한 것일 수 있다. 진보에 대한 열망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이 아직도 종북 빨갱이라 소리를 들으며 이념지향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은 꿈과 목표 그리고 그것을 정하는 영혼과 정신 없이는 애초에 정치를, 그리고 인간의 삶을 지속할 수 없기 때문일 수 있다.

뉴이재명과 586세대 하나로 묶는 답찾기

그래서 뉴이재명과 586세대-정치인들 간의 균열과 갈등을 전망하기에 앞서 확인할 게 있다. 두 가지다. 하나는 자산증식을 위한 중도보수실용노선의 구현에 대한 뉴이재명의 꿈과 586세대의 이념성이 정말 상충하냐는 것이다(586세대-정치인들이 아직도 혹은 실제로 비현실적 이상주의자들이고 이념지향적인지도 다시 확인할 문제다).

다른 하나는 양자를 묶을 유토피아의 관점과 비전은 과연 없냐는 것이다. 이 두번째 사항은 이재명정권이 진지하게, 너무 늦지 않게 답을 찾아내야 할 문제이리라. 하지만 반목과 대립의 가능성에 눈길이 먼저 가는 호사가들 역시 자기 논지의 전개를 위해서라도 살펴야 할 문제다. 누구든 ‘고통받는 자들을 하나로 묶는 희망의 원리’가 유토피아라는 데서 답을 찾을 수 있으리라.

김윤철 경희대 교수, 휴마니타스칼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