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발유 소비자가격 급등하자 경제부처 총력대응
국제유가 한때 배럴당 100달러 돌파·서울 휘발유값 2천원 육박
이재명 대통령 “최고가격제 신속 도입·유류세 추가 인하” 지시
석유제품 최고가격제·유류세 단계 확대 검토·정유사 현장조사
서울지역 휘발유 소비자가격이 리터당 2000원 선에 육박하자 경제부처들이 총력대응에 나섰다. 정부가 29년 만에 석유 최고가격제 카드를 꺼냈다. 이재명 대통령은 가격 상한제 도입과 유류세 추가 인하·공정위 등 경제부처 현장조사를 동시에 지시했다.
방아쇠는 리터당 2000원 턱밑까지 치솟은 기름값이었다.
◆연일 발언 수위 높이는 대통령 = 10일 정부에 따르면 이재명 대통령은 전날 오전 청와대에서 중동 상황 비상경제점검회의를 주재하면서 강도 높은 시장안정 지시를 내렸다.
이 대통령 지시 사항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30년 만에 부활하는 석유제품 최고가격제(가격 상한제)를 이번 주 내 고시 제정 절차를 마무리해 즉시 시행할 것. 둘째는 현행 7% 수준(리터당 약 50~80원)에 머물고 있는 유류세 인하 폭을 최대 250원 추가 인하하는 방안을 폭넓게 검토할 것. 셋째 화물차 기사·소상공인·농어민 등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한 소비자 직접 지원 방안도 병행 마련할 것 등이다.
◆30년 만에 최고가격제 검토 = 한국석유공사 오피넷(Opinet) 집계를 보면 10일 오전 8시 현재 서울 평균 휘발유 소비자 가격은 리터당 1952원이다. 전쟁 발발 직전인 2월 27일(1740원)보다 약 13% 올랐다. 국제유가는 배럴당 107~108달러(두바이유)까지 치솟았다. 이번 유가 급등의 특이점은 ‘비대칭성’이다. 국제유가 인상분은 3일 내에 소비자 가격에 반영되지만, 하락 시 반영은 평균 2주 이상 지연되는 구조가 가격 담합 의혹을 키우고 있다.
재정경제부와 산업통상자원부는 석유사업법 제23조에 근거한 석유제품 최고가격제 고시 제정 절차에 공식 착수했다. 최고가격은 전국 단일 또는 지역·유종별 차등 방식으로 설정하고, 2주 주기로 국제유가 연동 조정하는 방식이 유력하다.
최고가격제 도입 시 정유사 손실분은 일반예비비(약 8조원)와 조기 추경 재원으로 보전하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 최고가격제의 근거가 되는 석유사업법은 1970년 제정됐다. 1970년대 두 차례 석유 파동과 1991년 걸프전 때 활용됐다.
동시에 현재 7%(리터당 약 50~80원) 인하 중인 유류세를 법정 최대치인 37%(휘발유 기준 최대 516원)까지 확대하는 방안도 추진된다. 당국은 유류세 인하보다 최고가격제가 가격 안정 효과가 크다고 판단하면서도, 두 방안을 동시 활용하는 ‘투 트랙’ 전략을 구체화하고 있다.
◆공정위, 정유 4사 현장조사 = 공정거래위원회는 전날 SK에너지·GS칼텍스·S-OIL·현대오일뱅크 등 정유 4사 사업장에 조사관을 전격 파견해 현장조사에 돌입했다. 국제유가가 오른지 이틀 만에 소비자가격이 통상 시차(2~3주)를 무시하고 급등한 것은 담합 가능성을 시사한다는 판단에서다.
주병기 공정위 위원장은 “시장 교란 행위에 대해선 신속하고 엄중하게 제재하겠다”고 강조했다. 조사 대상은 가격 책정 내부 문건, 정유사 간 협의 기록, 주유소 대상 공급가 공문 등이다. 공정위는 담합이 확인될 경우 과징금 부과 및 형사 고발도 검토하고 있다. 아울러 국세청도 정유사·주유소의 세금 탈루·가짜석유 유통 여부에 대한 병행 조사에 착수해, 유통 전 과정에 걸친 입체적 감시망이 가동됐다.
정부는 10일부터 재경부·산업부·공정위·국세청 등과 합동으로 전국 석유 유통망 특별 점검에 돌입한다. 주유소·대리점·도매상 등을 대상으로 월 2000회 이상 암행 단속을 시행한다. 정부는 △허위 영수증 발행 △가격 부당 인상 △가짜석유 유통 △사재기를 집중 적발할 방침이다.
에너지팀·통상팀·공급망팀 등 부처 내 태스크포스(TF) 3개도 동시 가동된다. 에너지팀은 비축유 방출 기준 재검토 및 미국산 원유 도입 확대를 검토한다. 통상팀은 대체 공급선(카스피해·서아프리카·호주) 긴급 계약을, 공급망팀은 LNG 스폿 계약 및 반도체 핵심 소재(브롬·헬륨)의 중동 외 조달을 각각 담당한다. 재경부는 “비축유는 현재 208일분이 확보돼 있어 단기 수급 차질은 없다”면서도 “장기 봉쇄에 대비해 원유 수입선을 중동 50% 이하로 낮추는 구조적 다변화를 병행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건전성과 위기대응 딜레마 = 문제는 재원이다. 최고가격제는 더 어려운 재정 문제를 불러온다. 정유사가 원가 이하로 판매하면 손실 보전 재원이 필요하다. 일반 예비비 규모는 약 8조원이다. 유가가 높은 수준을 유지하면 수주 안에 바닥날 수 있다.
유류세 추가인하는 세수축소를 부른다. 현재 휘발유 유류세 인하율은 7%다. 소비자 가격 기준 리터당 50~80원 수준의 혜택이다. 법정 최대 인하율은 30%다. 교통·에너지·교육세를 합산하면 실질 최대 인하 폭은 37%까지 가능하다. 리터당 최대 516원을 깎을 수 있다.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당시와 같은 수준이다. 정부는 현재 리터당 250원 추가 인하를 검토 중이다. 이 규모면 연간 세수 손실은 4조~5조원으로 추정된다.
청와대는 “추가 재원이 필요하다면 진지하게 논의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했다. 추경 편성을 사실상 열어둔 발언이다.
2026년 본예산은 728조원. 국내총생산(GDP) 대비 재정적자는 4.0%p 를 상회한다. 국가채무는 1415조원으로 국내총생산 대비 51.6%다. 10년 만기 국채 금리는 3.589%수준이다. 추경을 국채 발행으로 충당하면 이 수치들이 모두 더 악화된다. 재정건전성과 위기대응 사이의 딜레마가 정부의 핵심 과제로 떠올랐다.
한국이 마지막으로 석유 최고가격제를 가동한 것은 1991년 걸프전 때다. 당시에도 법적 근거는 1970년 석유사업법이었다. 위기는 약 6개월 지속됐다. 정부는 원가 이하 판매 기간 동안 예비비와 재정 이전으로 정유사를 보전했다. 이 경험은 결국 1997년 유가 자유화를 앞당기는 계기가 됐다.
지금 상황이 3개월을 넘기면 어떻게 될까. 정부 자체 비상 시나리오에서도 장기화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이번 조치는 해결책이 아니라 서막일 수 있다.
성홍식 기자 king@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