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경제 총동원령…중동발 경제위기에 비상카드 꺼냈다

2026-03-11 13:00:04 게재

고유가 12일째 … 비상경제장관회의 체제로 전환

석유 최고가격제 시행 … 유류세 추가 인하 검토

퇴직연금 개편·산업대전환 고용안정 계획도 논의

정부는 11일 오전 정부서울청사에서 제1차 비상경제장관회의를 열었다. 주재는 구윤철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장관이 맡았다. 행안부·농식품부·산업부·복지부·기후부·노동부·국토부·해수부·중기부·공정위·금융위 등 15개 부처 장·차관이 자리를 채웠다.

이날 회의는 개최 형식부터 달라졌다. 정부는 기존 경제관계장관회의를 비상경제장관회의로 격상해 매주 정례 개최하기로 했다. 관계기관 합동 비상대응반도 과장급에서 차관급으로 높였다. 구 부총리는 상기된 표정으로 “이상 징후 포착 시 신속하고 과감하게 대응하겠다”고 밝혔다.

미국·이스라엘의 이란 공습으로 촉발된 중동사태가 전면전으로 치달은 지 12일째다. 중동사태는 호르무즈 해협 일대로 확산하면서 브렌트유 현물 가격이 배럴당 107~108달러까지 치솟았다. 2022년 이후 처음으로 100달러 벽을 넘었다. 서울 지역 휘발유 가격은 11일 오전10시 기준 리터당 1946원으로 한 달 새 12% 뛰었다.

구윤철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이 11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비상경제장관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정훈 기자

◆석유 최고가격제 부활 = 고유가 대응의 핵심카드는 석유가격 최고가격제다. 정부는 이번 주 안에 시행한다고 못 박았다. 석유사업법 제23조에 근거한 최고가격제가 발동되는 것은 1997년 이후 약 29년 만이다.

구 부총리는 “대상 유종과 가격 기준을 구체화해 국민께 조속히 말씀드리겠다”고 했다. 현재 논의 중인 가격 기준은 전국 평균 리터당 약 1950원 수준이다. 가격 기준은 국제유가와 2주 주기로 연동해 조정한다. 위반 업체에는 영업정지와 최대 20억원의 과징금을 부과한다.

석유제품 매점매석 행위 금지 고시도 제정한다. 정유사와 주유소가 재고를 쌓아두거나 판매를 기피하는 행위를 원천 차단하겠다는 것이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이미 SK에너지·GS칼텍스·에스오일·현대오일뱅크 등 4개 정유사를 상대로 담합 의혹 현장 조사에 착수했다.

최고가격제에 더해 가격 인하를 뒷받침할 재정 수단도 총동원한다.

유류세 추가 인하가 검토 대상에 올랐다. 현재 7% 수준(리터당 50~80원) 인하 중인 유류세를 최대 37%p까지 확대할 수 있다. 추가로 250원을 내리면 연간 세수 손실이 4조~5조원으로 예상된다. 정부는 8조원 규모의 일반예비비와 추가경정예산(추경)을 재원으로 활용할 방침이다.

◆원유 수급 위해 공급망 다변화 = 화물차·버스·택시 등 영업용 차량에 지급하는 경유 유가연동보조금도 한시적으로 상향한다. 운수업 종사자의 생계 직격탄을 완충하겠다는 취지다.

소상공인을 위한 경영안정바우처와 긴급경영안정자금도 적극 지원한다. 에너지 비용 급등으로 직접 피해를 보는 자영업자를 겨냥한 조치다. 금융시장 안정에도 만전을 기한다. 기존에 마련된 100조원 이상의 시장안정프로그램을 필요시 확대하고 한국은행과 공조해 긴급 바이백·국고채 단순 매입 등 추가 안정 조치를 적기에 시행한다.

중동 의존도를 줄이는 공급망 다변화도 속도를 낸다. 중동 지역이 국내 원유 도입의 약 72%를 차지한다. 정부는 중동 비중을 50% 이하로 낮추기 위해 북미·카스피해·서아프리카 등 대체 수입원 확보에 나선다.

나프타가 특히 예민하다. 나프타는 석유화학 원료 중 중동 의존도가 가장 높다. 정부는 나프타를 ‘경제안보품목’으로 신속 지정하고 대체 수입원 확보와 재정·금융 지원 방안을 마련하기로 했다.

비축 측면에서는 IEA 기준 208일분의 원유가 비축돼 있다. 구 부총리는 “우리 경제의 위기 대응 능력이 갖춰져 있다”며 국민의 차분한 일상 경제활동을 당부했다. 금융시장 불안심리를 부추기는 가짜뉴스와 시세조종 등 교란 행위에 대해서는 무관용 원칙을 천명했다.

◆퇴직연금 20년 만에 대수술 착수 = 비상경제 대응에 묻혔지만 이날 회의에서는 퇴직연금 제도 개편도 핵심 의제로 다뤄졌다.

정부는 지난달 6일 노사정 공동선언을 토대로 퇴직연금을 도입 이후 20년 만에 대대적으로 개편하기로 했다. 골자는 두 가지다. 첫째는 기금형 퇴직연금 도입이다. 현행 계약형 방식은 사용자가 개별 금융기관과 계약해 운용하는 구조로 수익률이 낮다는 비판이 지속돼 왔다. 기금형은 공적 성격의 집합 기금이 전문적으로 운용하는 방식이다. 구체적 방안은 7월까지 확정하고 연내 관련 법 개정을 마친다는 일정이다.

둘째는 퇴직연금 사외적립 전 사업장 의무화다. 현재 퇴직연금을 도입하지 않은 사업장이 다수다. 특히 영세 사업장은 퇴직급여를 사내에 적립해 두다 폐업하면 근로자가 수령하지 못하는 사례가 빈번하다.

정부는 6월까지 사업장 실태조사를 마친 뒤 의무화 시기를 결정한다. 영세·중소기업 부담을 줄이는 방안도 7월까지 내놓는다.

기금형 퇴직연금 전환의 핵심목적은 수익률 제고다. 현행 계약형 퇴직연금의 최근 5년 평균 수익률은 2%대 초반에 머물렀다. 반면 국민연금의 20년 평균 수익률은 6%를 웃돈다. 장기 복리 효과를 고려하면 수십 년에 걸쳐 노후 수령액에 상당한 격차가 벌어진다.

정부는 관계부처·금융감독원·노사단체·분야별 전문가로 구성된 합동 실무작업반을 발족한다. 작업반은 노동자의 안정적 수급권을 보장하면서 수익률을 높이는 기금 운용 체계와 관리감독 방안을 마련한다.

퇴직급여 전액 사외적립을 의무화하면 퇴직연금 적립 자산 규모가 크게 늘어 자본시장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현재 국내 퇴직연금 적립금은 약 400조원 규모다.

◆AI·탈탄소 대전환에 맞선 고용계획 = 세 번째 의제는 산업전환 고용안정 기본계획이었다. 인공지능(AI) 확산과 탈탄소화라는 이중 구조전환이 가속하는 가운데 정부가 처음으로 전 생애주기 고용안전망을 체계화하는 계획이다. 6월까지 수립을 완료한다.

2030년 전후로 국내 취업자 수가 감소세로 돌아선다는 전망이 나와 있다. 저출산·고령화에 더해 AI가 단순 반복 업무를 대체하는 속도가 빨라지면서 산업구조 전환에 따른 실직 위험이 높아지고 있다.

계획의 핵심 축은 생애주기별 AI 역량 교육이다. 노동시장 진입 단계에서는 AI 기초 이해와 청년 AI 엔지니어 양성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활동 단계에서는 기업의 AI 전환(AX) 전문인력을 육성한다. 직업 전환 단계에서는 이직·전직 희망자를 대상으로 AI 관련 업스킬링·리스킬링 훈련을 제공한다.

산업전환 고용안정 계획은 사후 대응에서 사전 예방으로 패러다임을 바꾼다는 데 의의가 있다. 지금까지는 구조조정으로 실직한 뒤 직업훈련을 받는 사후적 지원이 중심이었다. 앞으로는 재직 단계부터 경력설계와 직무전환 컨설팅을 선제적으로 지원해 갑작스러운 고용 충격을 줄이겠다는 구상이다.

신재생에너지·배터리·수소 등 유망 신산업 분야의 고용 지원도 대폭 강화한다. 탈탄소 전환으로 폐지되는 석탄·내연기관 관련 일자리를 신산업 고용으로 흡수하는 경로를 만드는 게 목표다. 전남 광양 등 철강업 위기지역은 고용위기지역 지정을 검토하고 있다. 지역 단위의 맞춤형 고용안정 대책도 병행한다.

이날 제1차 비상경제장관회의는 단순한 유가 대응을 넘어 중·장기 경제 구조 개혁 의지를 함께 담았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정부는 비상경제장관회의를 매주 열며 상황을 점검한다. 국제유가가 배럴당 120달러를 넘기면 추가 대책 발동도 예고했다.

성홍식 한남진 기자 king@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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