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중에서 만난 ‘모리스 창’과의 대화
세계 반도체 산업을 재편한 대혁신가의 자서전이 문학적인 이유
언제나 각성하게 되는 것은 여행이 끝날 때쯤이다. 아이들 겨울방학을 맞아 떠난 대만 타이중 가족여행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귀국편 항공기 탑승을 앞두고 있다. 여러번 왔던 대만이라 이번에도 그저 먹고 마시고만 가기에는 마음 한 곳이 찔렸다.
비행기가 이륙하기 전까지 1시간이 남았다. 짬을 내 타이중국제공항 내 서점을 유심히 살핀다. 벽면 한쪽에 커다란 인물들의 전기가 놓여 있다.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빌 게이츠의 자서전, 교세라 창업자 이나모리 가즈오가 쓴 책, 대만적체회로제조공사(台灣積體電路製造公司, TSMC)의 창업자 모리스 창이 쓴 자서전이 나란히 놓여 있다.
물론 필자의 가장 큰 관심사는 대만에서 기업을 일군 모리스 창이다. 그의 자서전은 750대만달러였다. 우리 돈으로 치면 3만5000원 정도다. 기념으로 사갈까 수십 번 고민하다가 결국 내려놓는다. 돈도 돈이지만 중국어를 배우지 못했기에 짐이 될 게 뻔하다. 번역본이 있을 것으로 기대하며 아쉬움을 달랜다. 한국어판이 없다면 적어도 영어 번역본은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작가를 꿈꾼 모리스 창
오산이었다. 대만여행의 흥취가 식기 전 모리스 창의 책부터 찾았지만 번역본이 없었다. 한국어는 그렇다 쳐도 영문판도 없었다. 하릴없이 중국어 원서를 전자책으로 구매했다. 번역은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900쪽에 달하는 중국어 책을 우선 영어로, 영어를 다시 한국어로 번역하는 지난한 과정이었다. 소득은 기대 이상이었다.
기술과 공학 세계에 평생 몸담은 사람이라고 느낄 수 없을 만큼 모리스 창은 글을 잘 썼다. 이유가 있다. 그는 10대 시절 작가를 꿈꿨다. 저장성 닝보에서 태어나 난징 광저우 홍콩 충칭 상하이까지 피란을 다닌 소년은 매일 글을 썼다. 모리스 창은 어린 시절 “나는 작가 지망생이었다. 유소년기의 나는 글쓰기를 평생 업으로 삼고 싶어 했다. 작가의 꿈은 고등학교 졸업 전, 배를 곯을 것이라는 아버지의 무심한 한마디에 사라졌다”고 회고한다.
미국 유학을 떠난 18세의 모리스 창이 새로운 세계에 녹아들 수 있었던 통로도 문학이었다. 어린 시절 운동을 잘하지 못해 혼자 집에 머물며 아동문고를 읽던 소년은 10대가 되면서 중국 고전과 백화문학, 서유(徐訏)와 같은 현대 작가의 소설에 빠져든다. 모리스 창은 특히 서유 소설에 깔려 있는 ‘옅은 우울과 희미한 슬픔’을 좋아했다. 1944년 서유의 ‘풍소소(風蕭蕭)’가 발간되자 세 번이나 읽을 정도였다. 반세기가 지나고 타이중의 한 서점에서 모리스 창은 풍소소를 다시 발견한다. 자서전에는 즉시 호텔로 돌아와 이를 완독했다는 서술이 나온다. 모리스 창이 얼마나 책을 사랑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의 독서 편력을 미국에 먼저 건너간 셋째 삼촌이 일찍부터 알아봤다. 모리스 창은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MIT)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하기 전 하버드대학에서 1년을 수학한다.
훗날 그는 삼촌에게 ‘왜 바로 MIT로 가는 게 아니라 하버드를 거쳐 편입하게 했는지’ 묻는다. 삼촌이 대답한다. “내가 알던 너는 충칭 시절 문학에 매우 열정적이었단다. 상학을 공부하고 싶어 한다는 소식은 나중에 들었지. 과학이나 공학을 하고 싶다는 얘기는 네가 홍콩에 도착했을 때 들었어. 나는 네가 서서히 흥미를 확립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단다. 아주 전문적인 MIT로 서둘러 가기보다는 하버드에서 완충 기간을 갖는 게 낫다고 봤어.” 모리스 창은 삼촌의 이 판단을 두고 ‘신처럼 앞날을 헤아렸다(料事如神)’고 묘사한다.
하버드에서의 1년은 그가 인생을 통틀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시간이다. 하버드에 입학하고 그의 독서량과 독서폭은 폭발적으로 늘어난다. 그는 호메로스 헤밍웨이 피츠제럴드 골즈워디 싱클레어 루이스 제인오스틴 셰익스피어 버나드쇼의 작품을 읽었다. 또한 처칠의 2차 세계대전 회고록, 미국 대통령들의 연설문, 미국사·중국사·세계사를 다룬 여러 영어 저작을 읽었다. 조지 웰스의 ‘세계사 대관’, 기번의 ‘로마 제국 쇠망사’,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마르크스의 ‘자본론’ 등 고전도 탐독했다. 동시에 ‘뉴욕타임스’와 ‘타임’을 구독하기 시작한다. 커다란 인물의 토양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중국에서 온 유학생 모리스 창은 하버드에서 1년 동안 서구 문명에 전방위적으로 몰두했다. 미국 음악을 듣고, 미국 연극을 보고, 미국 박물관을 방문하고, 미국 농구와 아이스하키 경기를 관람하고, 무도회에 참석하며 현지 친구를 사귀었다.
중국 문화비평가 위치우위(余秋雨)는 이 시절 모리스 창이 “근본적으로 자신을 새롭게 빚어냈다”고 평가한다. 54세 나이에 텍사스인스트루먼트(TI) 등 미국 대기업에서 누리던 안정적 생활을 정리하고 대만으로 건너와 TSMC를 구상할 수 있었던 배경을 생각해 보자. 이는 외국인 유학생이라면 누구나 빚을 수 있는 그릇이 아니다.
모리스 창은 하버드 시절 혹독한 재창조 과정을 통해 커다란 기개를 갖췄다. 그는 스스로 헤밍웨이 책 제목을 인용해 하버드 시절 1년을 ‘이동 가능한 축제(A movable feast)’로 묘사한다. 이 문학적 축제가 일평생 기술·산업 세계에서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했던 그의 튼튼한 버팀목으로 작용했다.
MIT 박사 과정 낙방, 반도체로 발길 돌려
모리스 창의 자서전에는 문학적 향기가 물씬 묻어 있다. MIT에서 기계공학 학사와 석사를 마친 그는 으레 그렇듯 박사학위에 도전한다. 교수 자리는 1950년대 중국인 유학생이 미국에서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직업이었다. 하지만 그는 MIT 박사과정 입학 자격시험에 두번 낙방한다. 모리스 창은 다른 학교를 찾아 박사 학위를 따는 길 대신 직접 일자리를 찾아 나선다. MIT 박사 과정 낙방은 그가 반도체 업계에 들어오는 결정적 계기로 작용한다.
반도체를 독학하며 역량을 쌓던 모리스 창의 잠재력을 TI 창업자 패트릭 해거티가 알아본다. 그가 박사학위가 없는 사실을 알고 해거티는 회사가 전액을 부담하는 과정을 제안한다. 조건은 학위 취득 후 5년 동안 TI에서 근무하는 것이었다. 스탠퍼드에서 전기공학 박사학위를 받고 TI에 복귀한 그는 이때를 회상하며 마리오 푸조의 소설 ‘대부(The Godfather)’를 인용해 “거절할 수 없는 제안(An offer that he can’t refuse)”이었다고 표현한다. 표면상으로는 파격적이고 유리해 보이지만 이를 거절할 경우 TI에서 입지가 위태로워지는 치명적 순간이었다는 의미다.
동과 서, 기술과 문학의 상호관조
기술 업계 거장의 문학적 서술에서 모리스 창이 걸어온 장대한 여정의 기품이 느껴진다. 앞서 말한 위치우위는 자서전의 서평을 쓰며 “21세기에도 기술 혁신의 최전선에서 세계에 영향을 미치려면 반드시 조기에 정신적 확장과 문화적 이동를 실행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로써 “동서양 문화가 상호 관조 속에서 압박을 줄이게 해야 하며 특히 지나치게 무거운 자국 문화의 압박을 덜어내야 걸림돌 없는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고 덧붙인다.
위치우위는 모리스 창을 동양문화와 서양문화의 상호관조로 해석한다. 필자는 여기에 하나를 더해 모리스 창의 자서전을 기술과 문학의 상호 관조 속에서 읽었다. 기술만 이야기하는 기술 업계 종사자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문학만 외치는 문학계 인사도 차고 넘친다. 하지만 문학적 상상력으로 무장하고 기술업계에 뛰어들어 세계를 제패한 커다란 인물은 드물다.
필자는 그동안 이런 인물을 미국에서 찾아 헤맸다. 과학과 예술의 교차점을 지향한 폴라로이드 창업자 ‘에드윈 랜드’, 기술과 인문의 교차점을 이야기한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가 대표적이다. 여기에 중국에서 태어나 18세에 미국으로 건너가 54세에 대만으로 돌아온 TSMC 창업자 모리스 창 아니 장충머우(張忠謀)를 추가하겠다.
2005년 대만 경제지 ‘상업주간’은 사고(思考)를 주제로 모리스 창을 인터뷰한다. 그는 독립적 사고의 비결로 독서를 통한 동서고금 대가들과의 대화를 꼽았다. 타이중에서 발견한 모리스 창 자서전을 읽는 행위도 그와 나누는 대화로 볼 수 있다. 필자에게 건넨 마지막 당부는 ‘평생학습’이다. 커다란 사람은 일상에 매몰되지 않는다고 했던가. 세계 반도체 생태계를 재편한 94세 청년은 지금도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글을 쓰고 있다.
‘AI와 실리콘밸리 반문화’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