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증시 밸류업 발목잡는 중복상장…“거래소 역할 키워야”
시가총액 기준 18% 비율로 세계 최고 수준
일본 4%, 거래소 중심 개혁 467곳→215곳
한국 증시 저평가(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결하기 위해 세차례에 걸친 상법 개정 등 여러 기업가치 제고(밸류업) 정책들이 진행됐다. 추가적인 증시 개편 정책으로는 주가 누르기 방지법, 중복상장 규제 관련 법안이 우선 과제로 언급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 한국 증시의 고질적인 저평가 요인으로 꼽히는 모자기업 동시상장, 이른바 중복상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의 시장 규율 모델을 참고해 거래소의 역할을 키워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단순한 입법이나 규제 중심 접근만으로는 한계가 있는 만큼 한국거래소가 기업과 투자자 사이에서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일본 히타치, 22개 상장 자회사 1개로 통합 = 13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시가총액 기준으로 한국 상장사의 중복상장 비율은 18.4%로 세계 최고 수준이다. 0.35%에 불과한 미국과는 애초 비교가 어렵다. 대만(3.18%)이나 중국(1.98%)도 한국보다 훨씬 낮은 수준이다.
일본의 경우 중복상장이 많았지만 최근 몇년 동안 거래소를 중심으로 거버넌스 개혁을 진행하며 수치를 많이 줄여 4.38%에 그쳤다. 실제 2007년 467개사에서 2025년 215개사로 절반으로 줄어들고 있는 상황이다.
전일 서울 여의도 FKI 빌딩에서 열린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 주최의 ‘중복 상장과 소수주주 보호-일본 사례를 통한 정책적 시사점’세미나에서는 일본의 성공 사례가 나왔다.
김정남 전 네덜란드 연기금자산운용(APG) 아시아·태평양 선진시장팀 대표는 일본의 대표적인 기업 구조 개편 사례로 히타치(Hitachi)그룹을 소개했다.
금융위기 이전 22개의 상장 자회사를 보유했던 일본 히타치는 금속·건설·화성 등 주요 계열사를 순차적으로 완전자회사로 편입하거나 매각해 상장 자회사를 ‘0개’로 줄였다. 그룹 전략을 일원화하고 해외 투자자 신뢰를 높이기 위한 조치였다.
상장사를 1개로 일원화 한 이후 히타치그룹의 자기자본이익률(ROE)과 주가순자산비율(PBR)은 대폭 개선됐다.
김 전 대표는 “히타치는 히타치금속 등 주요 계열사를 공개매수(TOB)를 통해 완전 자회사화하거나 매각하는 방식으로 상장 자회사 수를 줄였다”며 “이 과정에서 사업 구조를 단순화하고 핵심 사업 중심으로 다시 재편했다”고 말했다.
김형균 차파트너스자산운용 본부장은 “히타치는 일부 소수 지분 투자 형태를 제외하면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상장 자회사가 거의 없는 구조로 바뀌었다”며 “이후 히타치의 기업 가치는 크게 상승했고 현재 일본 증시에서 시가총액 상위 기업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았다”고 평가했다.
지배구조 개선이 기업가치 제고로 이어진 대표적인 사례다.
◆금융 당국과 거래소 중심의 시장 규율 중요= 이는 일본 금융청(FSA)과 도쿄증권거래소(TSE)를 중심으로 한 시장 규율 강화의 성과라는 평가가 나온다.
김 전 대표에 따르면 TSE는 상장사들에게 중복상장을 유지해야 하는 ‘합리적 이유’를 명확히 밝히라고 강도 높게 요구했다. 또 자회사 핵심 사업의 시너지가 높다면 100% 완전 자회사로 편입하고, 시너지가 없다면 지분을 전량 매각하라는 ‘최적의 소유자(Best Owner)’ 원칙을 기업들에 제시했다.
이 과정에서 TSE는 지난 2023년 PBR 1배 미만 기업에 개선안 공시를 의무화하고 이를 이행하지 않은 기업 명단을 매달 웹사이트에 공개하는 등 강력한 조치를 취했다. 그 결과 2024년 초 약 85% 이상의 기업이 대응 공시를 내놨다.
김 전 대표는 일본처럼 거래소가 중심이 돼 시장 관행을 바꾸는 방식이 더 효과적일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한국은 정치권·금융위원회 중심으로 입법과 강제 규범이 먼저 만들어지는 경향이 있지만 일본은 거래소가 주도해 투자자와 기업의 인식을 바꾸는 방식으로 개혁이 진행됐다”며 “거래소가 투자자 참여를 유도하고 기업 인식 변화를 이끌 때 시장 문화도 자연스럽게 바뀔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한국에 필요한 변화로 △자회사 소액주주와 이해관계 충돌 위험에 대한 인식 강화 △자회사 상장·상장폐지 과정에서 소수 주주에게 공정한 기회를 보장하는 제도 마련 △이사회 내 독립위원회 설치와 투명한 운영보장 △일본 TSE 사례를 참고한 자본효율성 실질 공시 강화 △거래소의 보다 적극적 역할 등을 꼽았다.
이어진 패널 토론에서 이창환 얼라인파트너스자산운용 대표는 중복상장 비율 관련 자료를 공개하고 감축 목표를 제시할 것을 촉구했다.
이 대표는 “일본 도쿄증권거래소는 상장 자회사 비율 관련 데이터를 매년 공개하고 관련 원칙을 제시할 계획으로 알고 있다”며 “한국에서도 거래소가 해마다 상장 자회사 비율을 공개하고 이를 단계적으로 낮춰 나가겠다는 목표를 제시하는 방식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김영숙 기자 kys@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