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칼럼

견월망지(見月忘指), 과학기술의 본질을 묻다

2026-03-16 13:00:01 게재

생명이 탄생하는 과정은 우리에게 ‘비효율이 만드는 역설’이라는 심오한 화두를 던진다. 유아기 뇌를 보면 초기 단계의 시냅스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며 복잡한 망을 형성한다. 환경으로부터 쏟아지는 방대한 정보를 수용하기 위해 일단 가능한 모든 연결망을 최대한 확보해 두는 것이다. 이후 ‘시냅스 가지치기(Synaptic Pruning)’라는 심플화 과정을 통해 빈번하게 사용되는 연결은 강화하고 불필요한 연결을 제거함으로써 비로소 뇌 기능은 정교하게 최적화되고 고도의 정보 처리 능력을 갖추게 된다.

손가락이 형상화되는 과정 또한 이와 궤를 같이한다. 처음부터 다섯 손가락이 돋아나지 않고 벙어리장갑 같은 판 모양을 만든 뒤 손가락 사이 세포들이 ‘세포 사멸(Apoptosis)’로 제거되며 섬세한 마디가 형성된다. 이는 조각가가 거대한 석재의 볼륨을 먼저 확보한 후, 조각도로 불필요한 부분을 깎아내며 내면의 형상을 찾아가는 과정과 동일하다.

언뜻 낭비처럼 보이는 ‘선(先) 확장 후(後) 정제’의 과정은 발생 단계의 오류를 최소화하기 위한 생물학적 필연이다. 충분한 볼륨을 확보해야 유전적 선택을 거쳐 결함 부분을 솎아내면서 완전한 기능을 생성할 수 있다. 이는 10개월이란 한정된 시간 내에 다양성과 수월성을 동시에 확보하려는 생명체의 고도화된 전략인 셈이다.

이 과정에서 파생되는 세포 잔해조차 재활용된다는 사실은, 때론 가장 비효율적으로 보이는 경로가 최선의 결과를 낳는 최적의 경로임을 뜻한다.

비효율 속에서 최적을 찾는 자연의 원리

결국 비효율을 딛고 최적을 찾아내는 과정은 자연계가 선택한 진화의 대원칙으로, 자연의 섭리를 탐구하는 과학기술 연구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현재 한국 과학기술계의 가장 중대한 지표는 정부 R&D 예산이 30조원이라는 임계점에 도달했다는 사실이다. 30조원이라는 숫자가 지닌 상징성은 지대하다. 이는 기존 연구의 연속성을 보장함과 동시에, 시대적 요구인 AI를 접목한 ‘K-문샷(K-Moonshot)’과 같은 도전적 전략을 적기에 적절한 규모로 추진할 수 있는 유의미한 체급을 갖추었음을 의미한다.

과거에는 새로운 이슈가 발생하면 계속 과제 예산을 조정해 대응하는, 이른바 ‘아랫돌 빼서 윗돌 괴기’식 운영이 불가피했다. 그 결과 정책은 일관성을 잃고 연구 현장은 시류에 휩쓸리는 갈지자 행보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젠 매년 발생하는 5조원 이상의 유동 자산을 통해, 기초연구라는 뿌리를 흔들지 않고도 전략적 신규 과제를 병행할 수 있는 토양이 마련됐다.

이러한 규모의 경제는 기초연구의 다양성과 수월성, 응용·개발의 선택과 집중이 공존하고, 연구 분야별 고유색채가 발하는 ‘무지개형 생태계’를 가능케 한다. 아울러 규모에 걸맞게 정부 R&D는 민간의 상업적 논리와 차별되는 ‘인내자본(Patient Capital)’으로서의 정체성을 명확히 해야 한다.

이는 단순한 자금 투입을 넘어, 불확실성이 큰 연구의 리스크를 국가가 분담하고 장기적 가치를 기다려주는 전략적 후원을 의미한다. 세계를 선도하는 연구는 긴 호흡의 축적이 만든 토양 위에서 비로소 꽃을 피울 수 있다. 과기정통부가 수립 중인 제6차 과학기술기본계획은 이러한 기다림의 철학을 담아야 한다.

과학계 카르텔 논쟁은 필수적인 양적 성장 과정을 단순 비효율로 매도하며 생태계의 근간을 흔들었다. 이는 손가락을 빚기 위한 볼륨업 단계를 부정하고 조각도를 빼앗은 격이었다. 연구자들은 학위과정을 통해 스스로 문제를 정의하고 해결하는 ‘셀프엔진’을 장착한 주체들이다. 이 엔진은 연구비란 물리적 환경뿐 아니라, 자신의 연구가 국가에 기여한다는 자부심을 동력 삼아 가동된다. 정부 R&D 예산의 근간은 국민의 소중한 세금이다. 확대된 예산 규모에 맞는 혁신적 결과를 도출하는 것은 연구자의 당연한 책무다. 연구자들이 다시 엔진을 힘차게 돌릴 수 있도록 외형적 회복을 넘는 상호 신뢰를 구축하고 과학기술계가 자긍심을 되찾도록 진심 어린 성찰이 병행돼야 한다.

이제 우리는 ‘본질을 보는 마음’으로 과학기술을 대해야 한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끝에 매몰되어 달의 존재를 잊는 우를 범해선 안된다. 과학기술의 긴 여정에서 겪는 시행착오는 결코 무의미한 낭비가 아니라, 경험의 밀도를 높이는 소중한 자산이다. 양적 확대는 질적 성장을 위한 축적의 시간이며, 당장의 미흡한 결과조차 잘 관리한다면 향후 더 큰 성공을 위한 자양분이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과학기술에 필요한 기다림의 철학

중요한 것은 규모가 주는 가능성을 각 분야의 특성에 맞게 활용하는 지혜다. 이때 필요한 덕목은 신뢰를 바탕으로 한 기다림과 이에 상응한 연구자 스스로의 동력이다.

본 칼럼에서는 손가락과 달을 같이 보는 자세로 과학기술계 이슈와 현안의 본질에 다가가고자 한다. 달을 바라보되 손가락 끝의 정교함도 잃지 않는 균형잡힌 시각으로 과학기술을 논해 나갈 것이다.

연세대 특임교수

전 과학기술인공제회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