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고속 추경’…중동발 복합위기 속 ‘민생 방파제’가 정책목표

2026-03-17 13:00:01 게재

최대 20조 규모로 3월까지 정부안 편성 ‘속도전’

고유가·고환율·고물가 삼각위기에 ‘선별 재정지원’

물가자극하고 장기화하면 국채발행 불가피 우려도

미국-이란 충돌이 격화하면서 한국 경제는 ‘고유가·고환율·고물가’가 한꺼번에 밀려드는 복합위기 앞에 섰다.

17일 재정경제부 등에 따르면 원·달러 환율은 전날 장중 1501원을 찍으며 17년 만에 1500원선을 넘었다.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높은 한국은 비용충격이 곧장 물가·제조원가·수출채산성으로 전이되는 구조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는 “밤새워서라도 추경을 편성하라”는 대통령 지시를 기점으로, 관행을 깬 ‘초고속 추경’에 돌입했다.

속도를 내면서도 재원과 타깃을 얼마나 정밀하게 설계할 수 있느냐가 기획예산처 등 관계부처의 최대과제가 됐다. 또 에너지 충격을 ‘시간 벌기’가 아닌 ‘구조 대응’으로 연결할 수 있느냐는 점도 숙제다.

중동발 고유가에 유류할증료도 급등 중동 사태로 국제유가와 환율이 오르면서 오는 4월 국제선 항공권에 부과되는 유류할증료가 전달과 비교해 급등하며 여행객들의 항공권 요금 부담이 가중되게 됐다. 연합뉴스 이진욱 기자

◆1월 지표가 켠 ‘오일쇼크 경고등’ = 이 대통령과 정부가 속도전을 강조하는 배경에는 실물지표가 있다. 국가데이터처가 공개한 ‘2026년 1월 산업활동동향’을 보면 전산업생산은 전월 대비 -1.3%, 광공업 생산은 -1.9%로 감소했다. 소매판매는 +2.3%, 설비투자는 +6.8%를 기록했지만, 내수와 직결되는 건설기성은 -11.3%로 급감했다. 한마디로 ‘소비·투자는 버티지만 생산·건설이 꺾이는’ 불균형이 뚜렷해지는 추세였다. 여기에 고유가 비용이 덧씌워지면 기업·가계 모두 체력이 빠르게 소진될 수 있다는 것이 정부 판단이다.

실제 배럴당 100달러 선을 오르내리는 국제유가는 물류비 상승을 부채질하며 전방위적인 물가압박을 가하고 있다. 지난 12일 이 대통령이 수석보좌관회의에서 “위기상황에서는 재정의 속도가 곧 정책의 효능”이라며 신속한 집행을 지시한 배경이다.

특히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에너지 위기가 원자재 위기로, 원자재 위기가 다시 제조업 위기로 번지는 연쇄고리가 작동할 수 있다”는 경고도 나왔다. 조선업 현장에서 에틸렌 수급 차질이 거론되는 등, 에너지 충격이 ‘가격’만이 아니라 ‘물량’과 ‘공정’의 문제로 확산될 수 있다는 경고다.

◆빨라지는 추경 시계 = 고유가·고환율에 대응할 정책수단으로 정부는 일단 추경(추가경정예산)을 선택했다. 추경의 시간표는 점점 구체화하고 있다. 정부와 여당은 3월 말까지 추경 정부안을 국회에 제출하는 목표를 공식화했다. 국회 심의를 거쳐 4월 중순 이전 처리 가능성이 유력하게 언급된다. 전날 당정은 ‘초고속 편성, 초고속 처리’ 방침을 세웠고, 국회 제출 후 열흘 안팎 심사도 가능하다는 취지의 발언도 왔다.

추경규모는 최대 20조원 까지 거론된다. 다만 정부는 추경집행에 속도를 내기 위해 법인세 실적 확인 전 ‘세수 가추계’를 앞당겨 추경설계에 착수했다. 이 때문에 최종 규모는 법인세 신고·납부(3월 말) 이후 변동 여지가 남는다. 속도전의 그늘은 ‘가추계’의 불확실성인 셈이다.

이번 추경의 지출 방향은 ‘보편 지원’보다 ‘선별 집중지원’ 쪽으로 기우는 기류다. 정부·여당 논의에서 반복되는 키워드는 △에너지 수급 안정 △취약계층 에너지 바우처 △물류·운송 유류비 부담 경감 △수출기업 지원이다.

당정은 또 추경과 동시에 △비축유 방출(2246만 배럴, 3개월 단계적) △자원안보 위기경보 단계 격상(관심→주의) △원전 이용률 상향(60%대 후반→80%) △석탄 상한제 해제 등 공급처방을 병행하기로 했다. ‘돈을 푸는 추경’ 이전에 ‘물량과 발전을 늘리는 에너지 공급확대’ 카드를 같이 꺼내든 셈이다.

이밖에도 기획예산처와 정치권에서는 △중동발 고유가 피해 중소기업·소상공인에 긴급경영안정자금 6700억원 공급 △정책자금 상환만기 1년 연장과 가산금리 면제 △국제 운송비 수출바우처 한도 3000만원→6000만원 △중동 수출기업 1000개사에 1000만원씩(총 100억원) 긴급 물류 바우처 신설 등이 거론되고 있다.

◆‘국채 없는 추경’의 딜레마 = 정부는 “추가 국채 발행 없이 초과세수 활용”을 원칙으로 내세웠다. 핵심 근거는 반도체 업황과 증시 활황에 따른 법인세·증권거래세 등 세수여건 개선이다. 실제로 정부는 통상 절차를 건너뛰어 법인세 실적 확인 전 가추계를 만들었고, 이를 토대로 기획예산처가 사업 규모를 설계하는 구조로 움직이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불확실성이 따라붙는다. 국채 발행을 피할수록 시장에 주는 신호는 긍정적이지만, 초과세수 전망이 어긋나면 추경의 신속집행은 물론 재정원칙까지 흔들릴 수 있다. 1월 말 기준 국세수입이 전년 대비 6조2000억원 증가하는 등 세수상황은 일단 호조세다. 하지만 추경의 구체화는 결국 3월 말 법인세 납부 이후가 될 수밖에 없다. ‘빠른 편성’과 ‘정확한 재원’ 사이에 빈틈이 생길 수 있다.

이번 추경의 또 다른 변수는 석유제품 최고가격제 손실 보전이다. 정부는 제도시행과 함께 정유사 손실을 재정으로 지원한다고 밝혔다.

문제는 “현 시점에서 손실보전액을 정확히 추산하기 어렵다”(정책브리핑)는 점이다. 손실은 국제가격 변동과 연계되고, 단순히 ‘기존 공급가와 최고가격의 차이’만으로 손실을 산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유사가 원가 등을 반영해 제출하면 ‘최고액정산위원회’를 구성해 검토 후 산정하는 방식이다. 전쟁 장기화로 이 지원금액이 당초예상을 크게 웃돌게 되면 국채발행이 불가피한 상황이 올 수 있다.

◆물가 자극 논란도 = 추경이 물가를 더 자극할 것이란 우려도 있다. 하지만 정부는 “(현재 논의되는 추경규모라면)큰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한국은행도 ‘비용 보전형’ 성격을 감안하면 물가 자극 가능성은 크지 않다는 평가를 내놨다.

문제는 ‘고환율’이 별도의 채널로 물가를 자극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미 환율은 1500원대에 진입했다. 고환율이 고착화되면 수입물가가 올라가고, 이는 전체물가를 올려 추경의 체감효과를 깎는 역풍이 될 수 있다.

초고속 추경은 위기 국면에서 필요한 처방일 수 있다. 특히 이번 충격이 수요 부진이 아니라 고유가·고환율이 만든 비용 충격에 가깝다는 점에서 더 그렇다. 추경을 통한 취약계층과 운송·물류, 수출 중소기업의 ‘추가 비용’을 지원하는 선제적 재정정책이 필요한 시기라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문제는 추경이 해법의 전부가 될 수 없다는 점이다. 비축유 방출과 발전 믹스 조정, 통상·외교 재설계 등의 정책카드를 ‘시간 벌기’를 뛰어넘어 ‘구조 대응’으로 연계할 것을 주문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성홍식 기자 king@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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