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재정 파수꾼’ 넘어 ‘전략적 나침반’으로
정부가 국민의 혈세를 들여 대규모 사업을 추진하려면 예비타당성조사(이하 예타)라는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1999년 도입된 이 제도는 지난 27년간 1064개 사업을 검증하며 국민의 혈세 낭비를 막는 ‘재정 파수꾼’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 왔다. 필자도 과거 기획예산처 근무 시절 예타 실무를 담당한 바 있고, 현재도 민간위원으로 참여하고 있어 이 제도의 중요성을 체감해 왔다. 그러나 강산이 세 번 가까이 변하는 동안 우리 경제 규모는 4배 이상 커졌고, 기후변화 대응, 산업 혁신, 저출생과 지역 소멸이라는 절박한 과제에 직면해 있다.
최근 기획예산처가 발표한 ‘예타 제도 개편 방안’은 이러한 시대적 과제에 대응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제도 도입 이래 가장 혁신적인 개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 개편의 핵심은 예타를 ‘감시 도구’에서 넛지(nudge) 원리를 활용한 ‘전략적 투자 유도 기구’로 전환한 데 있다고 본다. 영국 그린북(Green Book)이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사전진단 도구에서도 넛지 원리는 그 효용이 입증된 바 있으며, 핵심은 일괄적 규제 대신 스스로 더 나은 결과를 선택하도록 유도하는 제도 설계에 있다.
예타 제도의 넛지 혁신
첫째, 기존의 획일적인 정책성 평가에서 벗어나 사업 목적과 특성에 맞게 부처가 자율적으로 정책효과 항목을 제시할 수 있도록 개방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AI 투자 사업은 혁신적 산업 생태계 조성, 고부가가치 일자리 창출 등을 경제적 파급효과로 제시할 수 있고, 복지사업은 취약계층 보호 확대와 같은 사회적 파급효과를 제시할 수 있다. 과거에는 예타 통과를 위해 정해진 평가 요소에 억지로 끼워 맞추는 기획이 많았다면, 이제는 사업의 고유한 가치와 효과를 입증하기 위해 더욱 정교하고 창의적인 사업 기획이 요구된다.
둘째, 기존 지역 낙후도 중심의 ‘지역균형발전’ 평가를 지역 성장을 유도하는 ‘균형성장 효과’ 평가로 개편했다. 과거에는 낙후된 지역일수록 유리한 점수를 받았기에 지자체는 사업의 미래 가치 극대화보다 낙후도를 입증하는 데 집중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제는 지역이 보유한 고유한 역사·문화·생태 자산과 미래 성장 잠재력, 그리고 해당 사업이 이를 얼마나 증대시키는지가 핵심 평가 기준이 된다. 이는 지자체가 지역 고유 가치를 발굴하고 이를 경제적 활력으로 전환하려는 자발적 노력을 유도하는 강력한 선택 설계가 될 것이다.
셋째, 예타 전 과정에서 전문 컨설팅을 통해 사업 완성도를 높일 수 있도록 하고, 조사기관의 적극적인 대안 검토를 의무화했다는 점이다. 기존 예타가 ‘심판’이었다면 이제는 사업 기획 단계부터 전문가의 도움을 받고, 조사 과정에서도 최적의 내용으로 수정·보완이 가능해졌다. 타당성이 부족한 경우에도 단순 탈락이 아니라 재기획을 위한 조언을 제공함으로써 대규모 재정사업의 질적 개선을 도모할 수 있다. 높아진 자율성만큼 책임성도 강화했다. ‘사업계획 적절성’ 평가를 신설해 운영 계획과 재원 조달 가능성을 면밀히 점검하고, 준비가 미흡한 사업은 보다 과감히 걸러내겠다는 방침이다.
균형발전에서 성장으로
이번 예타 제도 개편안이 현장에 성공적으로 안착한다면 우리 재정은 지역 소멸과 저성장의 파고를 넘는 강력한 마중물로 기능할 것으로 기대된다. 다만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는 말처럼, 5월까지 마련될 세부 지침과 가이드라인에 이번 개편 취지가 충실히 반영되도록 하는 것이 남은 과제다.
금오공대 IT융합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