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여성·평화·안보와 초기 기독교 여성 평화운동의 시사점

2026-03-25 13:00:05 게재

전쟁과 복합적 위기가 부각될수록 평화에 대한 관심은 높아진다. 2000년 채택된 유엔 안보리 결의 1325호, 여성·평화·안보(WPS) 의제는 평화 구축 과정에서 여성의 참여를 요구하며 성주류화, 참여, 예방, 보호라는 네 가지 축을 제시한다.

이 논의는 대체로 국가 단위의 정책 이행과 제도적 참여의 언어로 조명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한국의 역사적 경험을 돌아보면, 풀뿌리 수준에서 축적된 여성들의 평화 실천은 그 다양성과 지속성 면에서 결코 가볍지 않다.

한국 여성들은 국가 독립과 존립을 위해 교육과 계몽, 조직 활동을 전개했고, 해외 동포사회에서는 가정과 공동체를 떠받치는 구심점으로 조국에 대한 물심양면의 지원을 이어 왔다. 이러한 실천은 국가안보와 인간안보, 소극적 평화와 적극적 평화를 분리된 영역으로 다루기보다 상호 연동된 과제로 이해해 왔음을 보여준다.

동시에 평화를 선언적 이상이 아닌 질서와 책임 속에서 감당해야 할 현실로 인식해 왔다는 점을 드러낸다. 이는 1922년 설립된 여자기독교청년회(YWCA)의 평화운동에서 구체적으로 확인된다. 이들이 이해한 평화는 유토피아의 실현이 아니었다.

평화는 실천 속에서 완성돼

되려 인간과 사회의 갈등적 기질을 ‘인식’하고 그 한계를 넘어서는 평화의 근원을 ‘인정’했다. 곧 평화는 기독교 신앙에 기반한 하나님과의 화해, 그리고 그 회복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인간 간 조화에 대한 지향이 되는 것이다. 이에 따라 평화는 전쟁이나 폭력의 피상적 부재가 아니라 갈등의 현실 속에서도 건설적인 선택을 가능하게 하는 역량으로 이해되었고, 그 적용영역 또한 개인과 가정, 공동체, 국가 내부와 국가 간 관계로 확장될 수 있었다.

이 같은 평화 이해는 오늘날 평화 담론을 되돌아보게 한다. 첫째, 이상적인 평화의 실현이 좌절되면 개인의 허무나 사회의 냉소로 이어지기 쉽다. 그러나 개인과 사회의 한계를 넘어서는 평화의 근원을 인식할 때, 삶과 사회의 의미는 결과가 아닌 선택의 차원에서 재정립된다. 곧 평화는 유토피아에 대한 갈증이 아니라 여기-지금의 채워짐으로 전환된다.

둘째, 초기 기독교 여성운동의 평화 이해는 갈등에 매몰되지도 이를 미화하지도 않는다. 갈등이 부추기는 근시안적 선택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판단의 기준으로서 평화를 제시한다. 중요한 점은 이러한 신중함이 결코 갈등으로부터의 회피나 나약함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정의를 말하지 않는 순진한 평화주의와 달리, 이들은 교육과 조직, 돌봄과 연대의 구체적 실천으로써 왜곡된 질서에 대응하며 되려 갈등을 다스려왔다.

끝으로 이들의 평화 실천은 지속성을 강조한다. 개인의 내적 차원이든 국가적 차원이든 갈등은 예고 없이 발생하며 완전한 예방은 불가하다.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갈등의 완화를 위한 쉼 없는 노력이 요구된다. 평화는 일회적으로 성취된 상태가 아니라 반복적으로 지켜내야 하는 과정이다. 그 부재를 통해 인식되는 경향이 강한 만큼, 익숙한 단조로움을 견디고 근면히 지켜낼 때 평화를 누릴 수 있다.

평화는 반복적으로 지켜내야 하는 과정

평화를 선언이나 당위로 소모하면 그 의미는 공허해지기 쉽다. 그러나 질서와 책임, 그리고 지속적 실천으로 접근될 때 다른 가능성을 확인하게 된다. 한국 여성들이 축적한 평화 이해는 오늘날 평화 의제의 성찰에 귀중한 준거가 된다.

이도솔 서울YWCA 평화운동팀 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