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외도피사범 증가…송환 대응 강화
동남아 범죄 거점 확대·플랫폼 유통 확산 … 마약왕 송환 계기 외교 대응 본격화
필리핀 교도소 수감 중에도 한국으로 마약을 유통한 ‘마약왕’ 박왕열씨가 25일 국내로 송환되면서 해외 거점 범죄의 실체가 드러나고 있다.
필리핀에서 출발한 항공기가 25일 오전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하자 수갑이 채워진 박씨는 곧바로 경찰에 인계돼 호송차에 올랐다. 입국부터 이송까지 걸린 시간은 3분 남짓이다. 9년간 지연됐던 송환 절차가 단 몇 분 만에 마무리됐다.
박씨는 민항기를 이용해 입국했으며 기내에는 일반 승객도 함께 탑승한 상태에서 호송이 이뤄졌다. 공항 도착 직후 경찰과 법무부 인력이 신병을 확보해 즉시 이송 절차를 진행했다. 국제 범죄자의 이동이 일상적 교통수단과 동일한 경로로 이뤄졌다는 점도 특징적이다.
해외로 도피하거나 국외에서 국내를 대상으로 범죄를 저지르는 사례가 빠르게 늘면서 초국가범죄 대응이 핵심 과제로 부상하고 있다. 이번 박왕열 송환은 개별 사건을 넘어 해외 거점 범죄 구조를 압축적으로 보여준 사례로 평가된다.
경찰청에 따르면 지난해 신규 국외도피사범은 1249명으로 집계됐다. 전년 951명보다 31.3% 증가한 수치다. 한 해 도피사범이 1000명을 넘은 것은 처음이다. 이 통계에는 국내 범죄 후 해외로 도주한 경우뿐 아니라 해외에 체류하며 국내 피해자를 대상으로 범죄를 저지른 사례도 포함된다. 범죄의 무대와 피해가 국경을 넘나드는 구조가 고착화되고 있다는 의미다.
범죄 유형별로는 사기가 757명으로 전체의 60.6%를 차지했다. 사이버도박 141명(11.3%), 마약 범죄 87명(7%)이 뒤를 이었다. 도피 국가는 캄보디아 399명, 중국 254명, 베트남 193명, 필리핀 149명 등 동남아 지역에 집중됐다. 범죄 거점이 특정 지역으로 고착되는 양상도 뚜렷하다.
●범죄 무대 해외로 이동 = 이들 지역은 보이스피싱과 온라인 사기, 마약 유통 조직의 핵심 거점으로 활용되고 있다. 낮은 생활비와 느슨한 금융·통신 규제, 외국인 체류가 쉬운 환경이 결합되면서 범죄 조직이 장기간 활동할 수 있는 기반이 형성됐다는 분석이다. 단속이 강화되면 다른 국가로 이동하는 ‘풍선 효과’도 반복되고 있다.
범죄 구조도 빠르게 재편되고 있다. 조직은 해외에 거점을 두고 국내를 대상으로 범죄를 실행하는 방식이 일반화됐다. 보이스피싱은 해외 콜센터 중심으로 운영되고, 마약 역시 해외 생산·유통망을 기반으로 국내 유입이 확대되고 있다. 범죄의 실행과 피해가 물리적으로 분리된 구조다.
이번 사건은 이러한 구조가 한 단계 더 확장됐음을 보여준다. 박씨는 수감 상태에서도 휴대전화를 이용해 국내 유통책과 연락을 유지하며 마약 거래를 이어온 것으로 알려졌다. 물리적 구금과 범죄 차단이 분리된 것이다.
일부 해외 교도소에서는 수감자의 통신과 외부 접촉 관리가 느슨한 경우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경우 교정 시설은 처벌 공간이 아니라 범죄 운영 거점으로 기능할 수 있다. 교정 체계의 취약성이 범죄 구조와 결합되는 지점이다.
마약 유통 방식도 바뀌었다. 대면 거래에서 벗어나 텔레그램과 같은 익명 메신저 기반 주문·유통이 일반화되면서 국경의 의미는 사실상 약화됐다. 공급과 소비가 분리된 상태에서도 실시간 거래가 가능해진 것이다.
●수사 넘어 외교로 확장 = 범죄 조직이 해외에 기반을 두고 활동하는 구조는 여러 범죄 영역으로 확산됐다. 조직은 해외에 있지만 피해는 국내에서 발생하는 구조가 고착화되고 있다. 수사기관이 직접 접근하기 어려운 환경에서 범죄가 이뤄지면서 단속과 검거는 구조적으로 지연된다.
해외 범죄 대응의 가장 큰 제약은 제도다. 해외에서 형을 선고받은 범죄자는 원칙적으로 형기를 마친 뒤에야 국내 송환이 가능하다. 임시인도는 상대국 동의와 외교 협의가 필요한 예외적 절차다. 수사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영역이다.
박씨 역시 2016년 사건 이후 약 9년 동안 송환이 지연됐다. 이번 송환은 정상회담을 계기로 외교적 합의가 이뤄지면서 가능해졌다. 초국가범죄 대응에서 외교가 사실상 필수 수단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국가 간 사법 체계가 다른 상황에서 범죄자 송환은 외교 협상에 크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 정상외교가 수사 절차를 앞당기는 구조가 확인된 셈이다.
청와대측은 이번 송환이 해외 거점 범죄에 대한 대응 의지를 보여주는 사례라는 입장을 밝혔다.
●‘사건 처리’ 중심에서 ‘구조 통제’ 중심으로 전환돼야 = 전문가들은 초국가범죄 대응이 ‘사건 처리’ 중심에서 ‘구조 통제’ 중심으로 전환돼야 한다고 지적한다. 해외 거점 차단과 초기 단계 조직 해체, 플랫폼 기반 범죄 대응을 동시에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범죄 자금 흐름을 추적하는 국제 공조도 핵심 과제로 꼽힌다. 범죄 조직이 여러 국가에 자산을 분산시키는 방식이 일반화되면서 단일 국가 수사만으로는 실질적인 환수가 어려운 구조가 형성되고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국가별 수사 역량과 법 집행 수준의 격차를 줄이기 위한 제도적 협력도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범죄 조직이 단속이 느슨한 국가로 이동하는 ‘풍선 효과’를 차단하려면 공조 수준을 끌어올리는 작업이 병행돼야 한다는 것이다.
정부는 국제공조협의체와 공조 작전을 통해 대응을 강화하고 있다. 수사당국은 마약 유통망과 자금 흐름, 공범 구조 규명에 수사력을 집중한다는 방침이다.
장세풍·김형선 기자 spjang@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