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서울대 10개, 복제 아닌 혁신이어야 한다
최근 정치권과 교육계를 중심으로 ‘서울대 10개 만들기’ 구상이 뜨거운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이 구상은 수도권 집중 완화와 지역 균형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분명 의미 있는 방향이다. 그러나 냉정하게 짚어봐야 한다. 지금 우리 대학이 마주한 위기의 본질이 과연 ‘돈이 없어서’만인가. 2019년 이후 학령인구는 이미 급격한 하락 곡선에 접어들었고, 수도권 쏠림은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지금 대학이 직면한 위기는 재정 규모의 문제가 아니라, 대학의 존재 이유 자체를 묻는 구조적 위기다.
인공지능과 온라인 플랫폼이 주도하는 거대한 전환 속에서 지식의 생산과 유통 방식은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그럼에도 많은 대학은 여전히 학과 간 칸막이와 교수 중심의 경직된 커리큘럼이라는 낡은 관성 속에 머물러 있다.
애리조나 주립대학교는 기존 학과 체계를 과감히 허물고 융합 연구 중심 구조로 전환하며 혁신대학의 대명사가 됐다. 닐 암스트롱을 배출한 우주항공 분야의 명성을 넘어 공학 전 분야의 최고 명문으로 자리 잡은 퍼듀대학교 역시 지금 이 순간에도 학사 운영을 산학 연계형으로 더욱 유연하게 개편해 나가고 있다. 일본의 도쿄공업대학교는 학부와 대학원의 경계를 허물었고, 간사이 지역의 명문 리츠메이칸대학교는 국제화와 산학협력을 기반으로 융합형 교육을 확장하며 전 세계인을 예비 학생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단 하나다. ‘얼마를 투자했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바꾸었는가’에 집중했다는 것이다.
대학의 존재 이유 자체를 다시 묻는다
무엇보다 주목해야 할 사례가 칭화대학교다. 칭화대의 혁신은 ‘Being Kodaked(머물다 망할 것인가?)’를 거부하고 ‘Doing Fujifilm(과감하게 변할 것인가?)’을 선택한 전형이다. 엘리트 AI 인재를 집중 육성하는 ‘야오반(姚班)’, 창업과 벤처를 장려하는 산학협력 생태계, AI 활용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는 거버넌스 프레임워크까지 교육·연구·산업이 유기적으로 맞물리는 자생적 혁신 생태계를 구현해 낸 것이다.
미국 시카고대 폴슨연구소 산하 싱크탱크 매크로폴로가 선정한 세계 상위 25개 AI 연구기관을 보면 2019년 중국은 칭화대(9위)·베이징대(18위) 단 2곳에 불과했다. 그러나 2022년에는 칭화대(3위)·베이징대(6위)·중국과학원(14위)·상하이자오퉁대(17위)·저장대(23위)·화웨이(25위) 등 6곳으로 늘었고, 순위 또한 일제히 상승했다. 한 가지 불편한 사실은 대한민국 대학은 이 명단 어디에도 없다.
이 흐름은 ‘서울대 10개 만들기’ 정책에 분명한 방향을 제시한다. ‘서울대 10개 만들기’가 아니라 ‘세계적 혁신대학 10개 만들기’다. 그리고 이렇게 설명하면 된다. “혁신대학에는 서울대만큼의 예산을 지원하겠다”고. 재정은 연명의 수단이 아니라 구조 전환을 이끄는 ‘혁신의 마중물’이어야 한다. 그 혁신이 성과로 이어지고, 대학과 지역사회 사이에 선순환 생태계가 뿌리내린다면 그것이 바로 지역 대학을 살리는 ‘생명수’다.
변화 선택한 대학에 과감한 지원을
총장직을 수행하면서 절감하는 것이 있다. 관성을 내려놓지 못하는 대학에는 미래가 없다는 것. 100여 년 전 최초의 발전기가 주파수를 안정시키기 위해 거대한 쇳덩이 원판으로 관성을 유지했듯이 대학의 관성은 그만큼이나 무겁고 완강하다. 변화를 선택한 대학에는 과감한 지원을, 관성에만 기대어 변화를 두려워하는 대학에는 단호하게 지원을 끊어야 한다. 그것이 정부가 보내야 할 가장 명확한 신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