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전쟁 한달, 회복 기지개 켜던 한국경제 중대기로에 섰다
유가 100달러 돌파에 환율 1500원선 붕괴 … 스태그플레이션 공포 확산
25조원 규모 ‘전시 추경’ 긴급투입 … 지역화폐·에너지바우처로 민생 방어
최대변수는 중동전쟁 장기화 여부 … 전쟁 3개월 넘기면 ‘3고 고착화’ 우려
중동 전쟁이 발발한 지 한 달이 지나면서 한국 경제의 불확실성이 고조되고 있다. 자칫 고유가와 고환율, 고금리가 동시에 덮치는 ‘3고’ 현상이 고착화될 조짐이다. 경기 침체 속에서도 물가가 오르는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 우려도 커지고 있다.
정부는 25조원 규모의 추가경정예산(추경)안 편성과 비상경제상황실 가동 등 총력 대응에 나섰다. 문제는 핵심변수가 정부 통제권 밖이란 점이다. 전쟁 장기화라는 거대한 대외 변수 앞에 정책적 선택지는 갈수록 좁아지는 모양새다.
26일 정부 핵심관계자는 “정부는 ‘전시’라는 각오로 비상하게 대응하고 있지만, 대외불확실성 자체가 우리 정부가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이 최대난제”라며 “최악의 시나리오까지 염두에 두고 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요동치는 실물 경제 = 중동전쟁 한 달간 가장 뼈아픈 상처는 에너지와 금융 지표의 변동성이다. 브렌트유 선물 가격은 전쟁 발발 전 배럴당 50달러 후반대에서 최근 100달러를 돌파하며 2배 가까이 치솟았다. 원유를 전량 수입하는 한국경제 구조상 국제 유가 상승은 생산원가 상승과 소비자 물가 압박으로 직결된다.
환율 역시 ‘심리적 마지노선’으로 여겨졌던 1500원 선이 무너졌다. 지난 23일 원달러 환율은 1517.3원을 기록하며 2009년 금융위기 이후 17년 만에 최고치를 경신했다. 강달러 현상에 따른 고환율은 수입 물가를 추가로 끌어올리며 인플레이션을 심화시키는 원인이 되고 있다.
시장 금리도 요동치고 있다. 3년 만기 국고채 금리는 한 달 사이 약 57.6bp(1bp=0.01%p) 급등하며 연 3.6%대를 기록했다. 이는 기업의 자금 조달 비용 상승과 가계부채 이자 부담 확대로 이어져 소비와 투자를 동시에 위축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정부 ‘경기하방 위험’ 공식인정 = 이같은 경기지표 악화는 성장률 전망치 하향으로 이어지고 있다. 재정경제부는 최근 ‘그린북(최근 경제동향)’을 통해 8개월 만에 ‘경기 하방 위험’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위기감을 드러냈다. 국책연구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KDI)도 중동 전쟁이 물가와 소비, 투자 전반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경고했다.
민간 연구소들의 진단은 더욱 어둡다. 국제 유가가 100달러 선을 지속할 경우 연간 경제성장률이 최대 0.5%p 이상 하락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특히 전쟁이 1년 이상 장기화되면 한국 경제가 0%대 성장률이라는 초유의 정체 국면에 진입할 수 있다는 비관론도 고개를 들고 있다.
가장 우려스러운 대목은 스태그플레이션이다.
물가를 잡기 위해 금리를 올리면 경기가 얼어붙고, 경기를 살리기 위해 금리를 내리거나 재정을 풀면 물가가 뛰어 오르는 ‘정책적 딜레마’에 빠지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현재 한국 경제가 뚜렷한 해결책이 없는 복합위기 국면에 진입했다고 분석한다.
◆25조원 ‘전시 추경’ 투입 = 정부는 이 같은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25조원 규모의 추경 카드를 꺼내 들었다. 이재명 대통령은 이번 추경을 ‘전시 추경’으로 규정하며 신속한 집행을 주문했다.
이번 추경의 핵심은 ‘직접 지원’과 ‘골목상권 활성화’다. 저소득층 등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한 민생지원금을 지역화폐 형태로 지급해 소비진작을 도모한다. 고유가로 고통받는 서민들을 위해 에너지 바우처 지원 범위를 대폭 확대한다.
25일 취임한 박홍근 기획예산처 장관은 추경의 또 다른 축으로 ‘공급망 안정’과 ‘미래 투자’를 꼽았다. 박 장관은 석유 비축 물량 확보와 공급망 경로 다변화 예산을 반영하는 한편, 고용 한파를 겪는 청년층을 위한 일자리 보강책 마련에 집중하겠다고 밝혔다. 특히 적자국채 발행 없이 초과 세수를 활용해 재원을 조달함으로써 재정 건전성을 유지하겠다는 전략을 세웠다.
◆정책 조율과 장기전 대비 = 정부의 발 빠른 대응에도 불구하고 과제는 산적한 상태다.
우선 통화 정책과의 엇박자를 해소해야 한다. 정부가 추경을 통해 돈을 푸는 사이, 한국은행이 물가를 잡기 위해 금리를 인상할 경우 정책효과가 상쇄될 수 있다. 신현송 한국은행 총재 후보자가 ‘매파적(통화 긴축 선호)’ 성향으로 분류되는 만큼, 향후 재정-통화 정책 당국간 정교한 조율이 필수적이란 지적이다.
에너지 수급의 근본적인 체질 개선도 시급하다. 석유 최고가격제 시행에도 불구하고 국민체감 물가는 여전히 높다. 화석 연료 의존도를 낮추고 에너지 수입선을 다변화하는 중장기 미래 전략을 기획예산처 주도로 속도감 있게 추진해야 한다는 제안도 나온다.
정치권의 협치도 큰 숙제다. 25조원 규모의 추경이 효과를 보려면 골든타임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 야권에서 제기하는 ‘포퓰리즘’ 공세를 극복하고 국회 문턱을 빠르게 넘는 정부의 정무적 역량이 시험대에 올랐다.
연세대 경제학부 김정식 명예교수는 “현재로서는 추경 외에 거시경제 정책에서 쓸만한 카드가 많지 않다”며 “재정 여력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배분하고, 전쟁 장기화에 대비해 하반기 2차 대응 시나리오까지 선제적으로 준비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중동 전쟁 한 달, 한국 경제는 이제 막 상처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이 상처가 깊은 흉터로 남을지, 아니면 위기극복의 동력으로 작용할지는 정부의 위기관리 능력과 정책 정밀도에 달려 있다.
성홍식 기자 king@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