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 연계 자금세탁에 무너진 스위스 은행

2026-03-26 13:00:20 게재

제재 비웃은 고수익 추구 내부 경고에도 침묵 일관

베네수엘라와 이란, 러시아를 잇는 검은 돈의 흐름을 좇다 보면 결국 스위스의 소형 은행 하나로 모인다. 취리히의 엠베어 머천트뱅크는 한때 다른 은행들이 꺼리는 거래를 대신 처리해주며 급성장했다.

공동 창업자 폴미셸 폰 메레이가 고액 수수료 계약을 따낼 때마다 사무실에서 소 방울을 울렸다는 일화는, 이 은행이 얼마나 공격적으로 돈이 되는 틈새를 파고들었는지를 보여준다.

블룸버그는 25일(현지시간) 관계자들을 인용해, 엠베어가 이런 거래에서 때로 시세의 최대 10배에 달하는 수수료를 취했다고 보도했다. 정상적인 금융기관들이 위험 부담 때문에 손을 떼는 거래가 엠베어에는 오히려 고수익 사업이었던 셈이다.

겉으로는 번창했지만, 몰락은 예상보다 빨리 닥쳤다. 미국 재무부는 지난달 엠베어가 이란과 러시아 관련 불법 행위자들을 대신해 1억달러가 넘는 자금을 미국 금융 시스템을 통해 흘려보냈다고 지목했다.

미국 금융망에서 차단될 수 있다는 압박이 가해지자, 스위스 금융감독청 핀마(FINMA)의 청산 명령에 맞서 법적 대응을 하던 엠베어도 결국 백기를 들었다. 스위스 당국의 제재 절차가 더디게 진행되는 사이, 미국이 사실상 마지막 일격을 가한 것이다.

엠베어는 마이크 베어가 2018년 공동 창업한 은행이다. 그는 명문 사설은행 율리우스 배어 가문의 후손으로, 은행은 창립 초기부터 가문의 이름과 전통을 전면에 내세웠다. 기업금융과 자산관리를 함께 맡는 머천트뱅크 모델을 표방했고, 2025년 말 기준 고객 자산은 약 49억스위스프랑(약 9조3000억원), 고객은 700명 안팎으로 불어났다.

문제는 성장의 이면이었다. 미 재무부 산하 금융범죄단속네트워크(FinCEN)는 엠베어가 베네수엘라 관련 의심 거래에 이어, 러시아 전쟁 자금과 이란산 원유 대금을 흘려보내는 통로로 활용됐다고 봤다.

특히 미국은 이 은행이 이란 혁명수비대 정예부대인 쿠드스군의 국제 원유 밀수·자금세탁 계획과 관련한 결제까지 도왔다고 판단했다.

제재 대상 기업 터코카와 관련해 약 3700만달러(약 555억원)가 송금된 정황도 포착됐다. 터코카는 미국이 후티·헤즈볼라·이란 쿠드스군과 연결된 상품 운송 및 금융 거래 지원망에 관여한 것으로 보고 제재한 기업이다.

내부에선 경고도 있었다. 일부 직원들은 고위험 고객을 위해 달러 대신 스위스프랑이나 유로화 결제로 우회해 주는 방식으로 더 엄격한 달러 규제를 피하려 했다고 증언했다. 문제를 제기한 직원들은 조직 내 장벽에 막히거나 회사를 떠나야 했고, 은행 내부에는 침묵의 문화가 굳어졌다고 한다.

핀마는 2024년 공식 제재 절차에 착수했지만, 스위스의 복잡한 법 체계 탓에 은행은 제재에 불복한 채 영업을 이어갔다. 결국 결정타는 미국이 날렸다. 엠베어는 항소를 철회했고, 지난달 청산 절차에 들어갔다.

이번 사태는 스위스가 더 이상 범죄 자금의 은신처가 아니라고 주장해온 금융 개혁의 허점을 다시 드러냈다. 전문가들은 “결국 미국이 나서야만 스위스가 움직였다”고 지적한다.

이주영 기자 123@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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